김기형 목사 / 막 5:21-34


◎ 본문: 막 5:21-34
◎ 제목: 유명과 무명, 그리고 거듭남

1. 본문 개요
    a. 막 5:21-24           회당장 야이로와 예수님
    b. 막 5:25-34           열두 해 혈루증 앓는 여인과 예수님

2. 관찰
    a. 21-22절: 외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맞이하다
    b. 23-24절: 죽게 된 자신의 어린 딸의 치유를 간청하다
    c. 25-28절: 혈루증 앓는 여인의 믿음
    d. 29-34절: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자 혈루 근원이 마르다

3. 적용
    예수님께서 일행과 함께 다시 가버나움에 도착하였습니다. 또 다시 큰 무리가 맞이하였습니다. 그 때 갑자기 회당장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예수님에게 나아와 절을 합니다. 그리고 절박하게 간구합니다. 자신의 딸이 죽게 되었답니다. 방문해 주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 받아 살게 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부탁에 바로 그의 집으로 향합니다.

    회당장은 거룩한 직업입니다. 당시 회당장은 회당의 운영을 전반적으로 책임지는 사람으로, 그 마을의 부요한 지주가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회당장 야이로’는 그 마을에 가 장 덕망 있을 뿐만 아니라 부요한 사람이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이와 같은 그의 지위와 신분을 고려하면 야이로의 행동은 매우 의아한 장면입니다. 그만큼 지금 그가 얼마나 다 급한 상황에 처했는지를 반증해 줍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연신‘, 즉 여러 번 간구합니다.

    아무리 거룩한 직분이고 부와 명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딸의 죽음이라는 위기 앞에서는 한낱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예수님께 딸을 안수해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유명한 사 람‘ 야이로의 간청에 예수님께서는 즉시 반응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위기는 해소가 될 것과 같은 희망을 품게 만듭니다.

    24절을 보니까 야이로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는 예수님 주변에 큰 무리가 둘러쌉니다. 큰 무리는 이미 ‘거라사인 지방’에서 ‘군대 귀신’을 쫓아낸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것은 또다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실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무리들은 생각했을 겁니다. 큰 기대를 가지고 시끌벅적한 행렬이 연출됩니다.

    바로 그 때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유명한 사람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목에 이름도 없고, 직업도 없고, 게다가 부정한 무명의 한 여인’이 그 예수님께서 가는 길에 끼어듭니다. 25절에 그 여인에 대해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26절은 그 12년이라는 시간동안 이 여인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 여인은 먼저 ‘많은 의사에게 괴로움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헬라어 원문대로 번역을 하면 ‘그 동안 많은 의사들로부터 많은 것을 견뎌야 했다.’입니다. 혈루증에 대해 각 의사들이 각자 자신들 만의 치료법을 제시하고 적용하려 들었으니, 아마도 환자인 이 여인에게는 곤욕이었겠지요.

    그 결과 가진 것을 다 허비하였습니다. 혹시라도 의사들의 처방으로 낫기를 바랐기에 자신이 가진 돈을 다 치료에 갖다 바쳤을 겁니다. 당연히 많은 비용 지불로 인하여 가진 것을 탕진해야 했을 겁니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것은 그녀에게 도무지 ‘효험’이 없엇다는 겁니다. 오히려 더욱 악화되었을 뿐입니다.

    혈루증은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유출병입니다. 율법은 이를 부정으로 엄격하게 규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여인은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부정한 것에 접촉하면 접촉한 그 사람도 부정해 집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부정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이 여인은 철거하게 자신을 숨겨야 했습니다. 스스로 ‘무명’이 되어야 만 했습니다. 또한 이 여인은 도무지 사회적 관계 맺음이나 활동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없는 것과 매 한가지인 사람’이 바로 이 여인의 정체성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철저한 ‘무명’입니다.

    그런 여인이 무리 속을 끼어듭니다. 그 어두운 12년의 인생 가운데에 한 줄기 빛이 비춥니다. 큰 무리가 옹위하는 중심에 예수님이 계셨고, 야이로가 가졌던 믿음처럼 이 여인 역시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일이 만만치 않다는 겁니다. 어떻게 예수님과 접촉할 것인지가 관건인데, 자신은 부정한 여인입니다. 그러하기에 무리 속에 섞여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겠다는 여인의 선택은 무모했고 과감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정하고 이름 없는 ‘무명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짐으로 깨끗해 졌습니다.

    그녀는 ‘유명 의사들’에 의해 많은 괴로움을 받았으나 전혀 병의 차도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무명의 행동’으로 그녀의 몸은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자마자 혈루 근원이 곧 마르고,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까달았습니다. 자신이 믿은대로 결과를 얻은 겁니다. 이제 이 여인은 계획대로 은밀하게 무리를 빠져나오기만 하면 됩니다. 여전히 ‘자신의 무명’을 유지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30절에 예수님은 자신의 몸에서 능력이 빠져 나간 것을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 돌이켜서 제자들을 향하여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질문합니다. 그녀는 순식간에 몸이 얼어붙었을 겁니다.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무리의 밀접한 동행 때문에 수많은 접촉이 있었을 것을 상기시키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던 걸음을 멈춰 세우고, 자신을 만진 자가 누구인지 보려 주변을 둘러보십니다. 두려워 벌벌 떨던 여인은 이내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립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털어놓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딸아’라는 친근한 말로 부르시면서 ‘그녀의 믿음이 구원한 것’과 ‘그간의 고통에서 놓여 건강할 것’을 선언하십니다. ‘유명한 자’와 동행하던 예수님으로 인해 ‘무명한 자’가 온전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 복음, 즉 큰 기쁨의 소식은 부정한 것을 정결하게 하고, 죽이는 것을 살리는 현장에서 울려 퍼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단순히 ‘구원의 확신’의로 한정되지 않고 구체적으로 더러운 영이 쫓겨나고 참된 평화가 임하게 합니다. 앞서 ‘거라사인 지방’에서 군대 귀신을 쫓아 한 남자를 사회적, 영적으로 구원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이번에는 한 여자를 사회적, 영적으로 구원하십니다.

    구원의 소식을 결코 ‘유명과 무명’을 가리지 않는 기쁨의 소식임을 가르쳐주십니다. 주의 복음은 결코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만을 보십니다. 부정하고 손가락질 받고 사회에서 격리된 채 고통 속에 외롭게 살던 한 ‘무명의 여인’은 이제 이름을 얻고, 예수님과 시선을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구원’이라 부릅니다. 이것이 다름 아닌 복음입니다.

    이 새벽에 예기치 않은 장애물과 맞닥뜨리는 순간이 있다 할지라도 언제나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 가득하기를 기대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과거형이 아니라 늘 ‘현재진행형’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마다 내 인생의 구체적인 문제 가운데에 찾아오셔서 어루만지시고 고치시는 주님의 능력을 사모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바로 그 주님의 힘과 능력으로 저와 여러분을 ‘무명하나 유명한 자’로 서게 하신다는 사실을 신뢰함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땅을 디디고 살지만 늘 하늘나라 백성답게 천국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댓글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