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막 5:35-43

◎ 본문: 막 5:35-43
◎ 제목: 절망 속에 피는 소망

1. 본문 개요 및 관찰
    a. 막 5:35-36:           집으로부터 온 비보와 예수님의 명령
    b. 막 5:37-40:           야이로 딸의 죽음
    c. 막 5:41-43:           소녀를 살리시는 예수님

2. 적용
    고난은 불청객입니다. 이 세상 어떤 사람도 고난을 반가워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렇게 고난은 반기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고 없이 염치도 없이 불쑥불쑥 우리들을 찾아옵니다. 그렇게 찾아오는 고난은 우리를 너무나 당황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늘 ‘절망’을 안겨줍니다. 고난은 십중팔구 절망을 동반하곤 하지요.

    우리는 늘 물음표를 가지게 됩니다. 도대체 이처럼 절망으로 이어지는 고난의 시간에 주님은 어디에 계시느냐고 말입니다. 과연 주님께선 그 절망의 자리에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무슨 말을 하실까요? 그리고 희망을 상실하게 되는 그 한복판에서 주저앉아 있는 이들을 향해 주님은 과연 어떤 일을 하실까요? 아무리 신앙의 연수가 오래 쌓인다고 해도 쉽게 이 문제에 대해 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 본문은 그야말로 ‘절망’으로 시작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한 여인’이 받은 치유는 그 여인에게는 참으로 커다란 희망을 안겨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을 향하여 말씀하고 계시는 예수님에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야이로의 딸이 죽었음을 알립니다. ‘희망의 소식’을 전하는 자리에 ‘절망의 소식’이 찾아 들었습니다. 희망이 순식간에 절망으로 변했습니다.

    딸이 죽은 회당장 야이로는 이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회당장의 집에서 온 사람들은 ‘이미 딸이 죽었으니 예수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말라.’고 회당장에게 말합니다. 그 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36절에 뭐라고 말씀을 하십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야이로를 향해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예수님께서는 앞선 5:34에서도 ‘고침 받은 여인’을 향하여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무명하고 부정한 여인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듯, 유명하고 정결한 남자인 ‘회당장 야이로’도 같은 믿음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희망의 순간’이든 ‘절망의 순간’이든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믿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믿음’일까요? 그렇습니다. 결국에는 ‘예수님이 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믿음입니다.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고침을 받은 것은 결국 내가 지나 왔던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뒤로 한 채 오직 남은 것은 예수님의 능력뿐임을 믿는 그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미 죽었으니 예수님은 필요 없다는 말을 듣고 있는 ‘야이로’에게도 역시 ‘죽음의 문제’라 할지라도 결국 예수님이시면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시다면 두려워하지 않고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그것을 명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상황에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 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아무리 불청객인 고난이 우리를 찾아온다 할지라도 나 혼자서 그 ‘고난’을 마주하지 않으면 됩니다. 우리 주님은 늘 당신과의 동행 가운데에 모든 상황을 맞이할 것을 성도들에게 주문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늘 소유할 것을 요청하신다는 겁니다. 늘 그 믿음으로 무장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와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십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 외에 다른 제자들은 따라오기를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야이로의 집은 초상집니다. 곡소리가 울려퍼진 집에 당도하지 예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십니다. 통곡의 소리로 가득하지만 예수님의 ‘송곳과 같은 말씀’이 그 절망을 뚫고 나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의 말을 비웃습니다. 왜 ‘통곡하던 이’들은 ‘비웃음’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죽음이 모든 희망과 기대를 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절망으로 모든 희망과 기대가 꺾여 버린 자리에선 ‘믿음’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믿음’ 없는 이들이 예수님께 보일 수 있는 반응은 오직 ‘비웃음’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음 후의 부활’을 암시하십니다. 예수님이 함께 있는 곳에는 ‘죽음’도 ‘생명’으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에 그 분과 동행하는 자들은 늘 ‘생명’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 비웃음 속에 부활에 대한 믿음이 꽃 피우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능력이 당신에게 있음을 보이시고자 그 소녀를 향하여 외치십니다. ‘달리다굼’!! ‘일어나라’고 그 소녀를 향해 외치십니다.

    42절에 예수님의 ‘일어나라’는 명령에 죽었던 소녀는 ‘곧’ 일어나 걷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소녀의 나이가 ‘열 두 살’이라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12라는 숫자는 앞서 야이로의 집으로 오는 길에 치유함 받았던 ‘혈루증 알았던 여인’이 고통당한 ‘열 두해’와 연결됩니다. 열 두해 혈루증을 알았던 여인의 치유는 바로 이 소녀의 부활의 전조였던 셈입니다.

    또한 12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절망과 죽음, 부정과 배제, 불신의 공동체가 되어버린 것이 지금 이스라엘의 현 주소이지 않습니까? 여전한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 신음하며, 죄에 허덕이고 있는 이스라엘은 부활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희망과 생명, 정결과 포옹, 믿음의 공동체로 새롭게 창조될 것임을 이 ‘12세’ 소녀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쫓아내셨고, 귀신 들린 자로부터도 귀신을 내 쫓으셨던 분입니다. 이제 주님은 ‘절망과 고통’의 자리에서 비웃음 밖에는 할 수 없는 이들을 또한 몰아내고 계십니다. 절망과 고통을 밀어내시고 소망과 생명을 선물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야이로의 집에서도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을 선포하십니다. 죽음의 잔치를 생명의 잔치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이 새벽에 절망과 고난에 대해 대처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지 되돌아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는 야이로의 딸을 살린 사건을 통해 ‘믿는 자’에게 있어서 우리를 죽게 만드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불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은 잠입니다. 다시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깨어날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자에게 ‘죽음’은 감사할 일이지 놀랄 일이 아닙니다.

    고난과 절망의 시간을 살아갈 때에 ‘소망의 부활’로 다가오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간절히 붙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 더는 믿음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순간,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붙듦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이 새롭게 창조되는 놀라운 역사를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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