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강도사 / 막 6:1-13

◎본문: 막6:1-13

◎개요

1-6절 고향 사람들의 배척

7-13절 열두 제자 파송

◎본문연구

오늘 본문 말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먼저 1절부터 6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는 말씀의 내용이고, 7절부터 13절까지는 열두 제자 파송을 보내는 장면의 말씀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많은 사역을 하셨습니다. 본문은 가버나움을 떠나 고향인 나사렛으로 가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고향은 항상 그리운 곳이고, 따뜻하고, 편안한 곳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항상 가고 싶은 곳이지만, 가기가 쉽지는 않은 곳이죠. 본문에 고향을 뜻하는 파트리스라는 단어는 개인 출생지뿐 아니라 가족의 거주지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가버나움에서 나사렛까지는 대략 60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 최소 이틀 이상 걸어야 하는 거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왜 갑작스럽게 고향을 방문하셨을까요?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으로 향하자 제자들도 따라갑니다. 안식일이 되자 여느 때처럼 예수님은 회당을 찾으십니다. 거기에서 가르치시는데, 이 장면은 우리에게는 익숙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시 마을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낯설었을 것입니다. 안식일 회당에는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이들이 보인 첫 반응은 놀라움이었습니다. 가르침에 배어 있던 지혜와 손으로 행한 일의 권능 때문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알았던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죠. 예수님의 첫 가버나움 사역에서도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두고 권위 있는 새 교훈이라고 감탄하며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을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반응이 긍정적이었다면, 여기 고향 사람들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습니다. 마가는 그들의 생생한 반응을 다섯 가지 질문으로 전달해줍니다. 우선 예수님이 선보인 지혜와 권능에 대한 두 질문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서 이런 마법 같은 것들을 얻은 것인지 의구심에 질문을 던집니다.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나머지 세 질문에 고향 사람들이 공유하던 예수님의 생물학적 정보가 담겨져 소개됩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이었고, 목수였던 아버지 요셉의 직업을 이은 목수였습니다. 그리고 형제들,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과 누이들이 여전히 나사렛에 살고 있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가르침과 능력에 남다른 권위를 느꼈지만, 너무도 친숙한 생물학적 정보들은 오히려 믿음에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마가는 그들의 반응을 단도직입적으로 소개합니다. 3절 끝에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한지라. 이 거절은 지적 차원의 거부 의사를 넘어 적극적인 반대를 뜻합니다. 당시 문화 코드인 명예와 수치 차원에서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마을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수치스럽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점을 우려해 앞서 친족과 가족들이 미리 예수님을 방문해서 적당히 타이르고 회유해 돌이키려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갑작스러운 고향 방문은 바로 이렇게 고향 사람들의 적대적 반응과 함께 관심을 모으는 것이죠.

그리고 앞서 등장했던 회당장 야이로와 혈루증 여인의 사건, 즉 믿음으로 살아나고 고침받는 긍정적 믿음, 이 긍정적 믿음의 반응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고향 사람들의 배척에 예수님의 직접적인 반응이 이어집니다. 고향의 거절은 선지자적 전통이죠. 우선 부름 받은 선지자들은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러했고 예수님께서 그렇고, 마침내 제자들도 그렇게 되죠. 고향과 고향 밖의 온도 차이는 넓게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밖, 이방으로 확대되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대동하고 고향으로 들어오신 또 다른 이유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본문 말씀에 나오는 제자 파송과 관련해 제자들 역시 거절과 존경을 경험하게 될 것을 교훈하기 위함이었던 것이죠. 예수님의 반응이 상당히 다른 때와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올바른 믿음의 반응을 보여준 사람들에게 대단히 적극적으로 치유해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그런 사역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자신을 거절하고 배척하는 고향 사람들에게는 능력을 행하지 않으시는 것이죠. 본문 5절에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무능하시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거절에 대한 예수님의 의지를 한층 더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거절한 고향 사람들을 거절하심으로 권능을 베풀지 않으시는 것이죠. 고향 사람들이 거절하고 배척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자비와 구원을 맛보는 소수가 있었습니다. 소수지만 그 병자들을 고쳐주셨죠.

특별히 본문 6절에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처음에는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놀랐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그들로 인해 놀라십니다. 예수님의 놀람은 이곳이 유일하죠. 누구보다 먼저 믿고 자비와 구원의 수혜자가 되었어야 할 고향 사람들이 도리어 거절한 것에 예수님께서 놀라신 것이죠. 이 놀람은 결국 장치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의 거절이라는 더 심각한 반응, 더 큰 놀라움의 전조인 것이죠. 고향 마을이 자신을 거절하자 예수님께서 다른 마을들로 옮겨 가르치십니다. 고향의 배척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사역은 지속되고 확장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에 귀하게 쓰임받은 이들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죠.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따로 불러서 둘씩 짝을 지어 사역의 현장으로 보내십니다. 특별히 더러운 귀신 제어하는 권능을 수여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채비와 감당해야 할 사역 방식들을 명령하십니다. 우선은 제자들이 반드시 지참해야 할 것과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죠. 지금 예수님은 일종의 단기 훈련 상황에 제자들을 보내시고 계신 것이죠. 제자들은 금세 되돌아오게 되죠. 하지만 이 단기간의 경험은 훗날 초대교회를 이끌어가는 제자들의 리더십에 모범적인 소중한 경험이 되었을 것입니다.

열두 제자들이 둘씩 짝지어서 한 사역이 무엇입니까?

가서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하고, 주신 권능에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든 자들에게 기름을 바르는 치유 사역을 감당했던 것이죠. 이 사역이 누구의 사역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늘 해오시던 사역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해오셨던 사역을 제자들도 감당했다는 말씀의 내용입니다. 심지어 가장 잘 아는 고향 사람들의 배척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우리의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변함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회개를 선포하고, 귀신들도 쫓아내고, 병든 자들을 위해서 애써야 하는 사역을 모든 성도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스승을 닮아가고 따라가는 것이죠. 우리가 바로 예수님을 닮아가고 따라가는 제자들이 아닙니까. 비록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할지언정 예수님을 배척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누구보다 예수님을 닮고,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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