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강도사 / 눅 6:45-56

◎본문: 눅 6:45-56

◎개요

45-52절 물위를 걸어오신 예수님

53-56절 게네사렛 치유 사역

◎본문연구

오늘 본문 말씀 42절부터 52절까지는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에 관한 내용이고, 53절부터 56절까지의 말씀은 게네사렛 치유 사역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은 앞선 오병이어 사건과 줄거리 상 분명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헤롯의 잔치처럼 화려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베푸신 푸른 풀밭 위 화사한 저녁식사, 오병이어의 사건이 끝났습니다. 무리가 풍성한 배부름의 쉼을 경험하자, 그제야 예수님은 그들을 해산시키시죠.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아직 제자들을 위한 또 다른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죠. 예수님이 갑자기 제자들을 재촉하십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무리를 그룹으로 나눠 앉게 하셨는데 무리의 해산은 자신이 맡겠다며, 그들을 건너편 벳새다로 보내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맛본 쉼과 배부름도 잠시, 이제 예수님이 없는 배로 제자들만 건너야 합니다. 물론 그들에게는 평생 갈릴리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물길을 훤히 꿰뚫던 베테랑 어부들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을 먼저 보내신 예수님이 무리와 마지막 작별을 하신 후, 홀로 산에 오르십니다. 여느 때처럼, 예수님은 기도하시기 위해 빈들 곁 산에 오르셨고, 그 산은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제자들이 다시 분리가 됩니다. 앞서 사역 파송으로 잠시 분리된 이후 두 번째죠. 오병이어 사건에서 무리에게 떡을 나누어준 시점이 어둠이 내려앉을 때였다면, 식사를 마치고 해산까지 감안해서 족히 자정에 가까웠을 수 있습니다. 칠흑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시각, 예수님은 산 위에, 제자들은 바다 위에 있었습니다.

한참 후 산 위에 예수님이 바다 가운데 제자들을 보는데, 맞바람에 힘겹게 노를 젓는 제자들을 보십니다. 아무리 천체의 조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운 그런 어두움과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시선은 선명했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바다 가운데서 바람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베테랑 어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간힘을 다해 바람과 씨름하는 제자들의 생생한 모습을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마가는 이 시각을 밤 사경쯤, 새벽 3시쯤이라 기록합니다. 바다 한가운데서 북쪽 산비탈에서 내달리는 강풍에 배가 떠밀려 아무리 노를 저어도 전진할 수 없는 상황에 몇 시간째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예수님이 보시고 물 위를 걸어 그들에게 다가오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 생각해 소리를 지릅니다. 제자들을 보셨던 예수님과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제자들이 대조됩니다. 다가오는 형체가 유령 같았지만, 이제 자신들 앞에 선 실제 사람의 형상을 보자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칠흑같은 밤바다 한가운데 사람이 서있다는 사실은 커다란 두려움을 동반했던 것이죠. 제자들의 반응을 확인하신 예수님은 즉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들의 마음을 진정시키십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배에 오르십니다. 그러자 극렬했던 맞바람이 멈춥니다. 다시 한번 제자들이 놀라게 되죠. 두 번째 놀람은 첫 번째와 다릅니다. 배에 오르신 예수님 안에서 그분이 누구신지 더 큰 확신의 경험이 가져다준 믿음의 놀람인 것이죠. 본문 5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마가는 바로 앞선 오병이어 기적 사건을 다시 소환하며, 놀라운 기적을 맛본 지 몇 시간도 안되어 밤바다 한가운데서 보여준 제자들의 둔해진 마음을 꼬집는 것이죠. 오병이어에서 맛본 은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풍성한 생명이 아닙니까. 이렇게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또 다시 안전과 생명을 맛보게 되는 것이죠. 마가는 맞바람을 맞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이 언제고 찾아오셔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수 있음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죠.

본문 53절부터 56절은 게네사렛 치유 사역에 관한 말씀이죠. 예수님이 제자들을 재촉하사 건너가라고 하신 곳은 벳새다였습니다. 그러나 바람에 사투를 벌이고 예수님이 승선한 후 다시 잔잔한 바다를 지나 당도한 곳은 게네사렛입니다. 게네사렛은 벳새다 서남쪽 가버나움과 디베랴 사이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마가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무리하게 엮으면서 발생한 모순으로 생각합니다. 만일 그랬다면 마가는 굳이 배가 게네사렛에 당도했고, 거기에 정박했다고 자세히 묘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마지막 단락은 요약 기능이 강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서사적 시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배에서 내리자 금세 무리가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그들이 온 지방으로 소문을 퍼뜨려 또 다시 큰 무리가 몰려드는 모습으로 예수님 사역의 역동성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몰려든 사람들 중에는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갈릴리 호수 서북쪽으로 확대됩니다. 예수님의 발길이 닿는 곳곳마다 특별히 시장 같은 공공장소에 병자들이 모여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옷깃에 손대기를 간구했습니다. 실제 손을 대는 자들을 치유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인생들, 곧 목자 없는 양처럼 기댈 곳 없고, 소망없는 인생들의 현실 속에 찾아 들어가셔서 참된 쉼을 주십니다. 제자들의 배에 오르신 예수님이 인생들의 배에 오르신 것이죠. 그들은 모두 다 혈루증 여인처럼 성함, 바로 구원을 얻게 되죠.

인생은 누구나 쉽지 않죠. 갓난 아기라도 저마다의 고난이 있다고 합니다. 젖병을 먹기 위해서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젖병에 익숙해져야 하고, 힘껏 젖병을 물고 빨아야 하죠. 물론 우리의 고난은 예수님에 비할 바가 아니죠. 그리고 우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끝까지 견디게 되고, 견디는 것이죠.

그리스도인은 우리는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배에 올라타 있는 것이죠. 우리 배의 선장은 예수님이시죠. 순풍에 돛 단 듯 항해를 하면 가장 좋겠지만, 현실은 정반대일 때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제자리걸음이거나 퇴보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런 현실을 다 아시고, 보고 계시면서 외면하시고 응답이 더디신 주님이 때로는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안돌아 봅니까. 이 찬송가 가사가 스쳐 지나가지 않으십니까.

분명 예수님께서 다 아시고, 보시고 계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생의 폭풍과 파도는 잔잔하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이죠. 주님이 오셔서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해주시면 되는데, 파도야 잔잔하라고 말씀해주시면 되는데, 참고 견디고 인내해야 하는 시간은 점점 더 길어지죠. 왜입니까? 주님의 때가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우리가 더 인내하고 견디므로 믿음이 더 성숙해지도록 하기 위하심이죠. 우리를 단련하신 후에 정금같이 주님 앞에 나아오도록 하시기 위함인 것이죠. 정금이 되려면 높은 온도의 불에 단련이 되어서 불순물들을 태우고 제거해야만 정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인 것이죠. 우리에게 있는 불순물들, 악한 버릇과 습관들, 악한 것들을 태우고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단련하시는 것이죠.

인생의 폭풍과 파도 속에서도 내니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시는 그 주님이, 우리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에 끝까지 참으시고 인내하셔서, 우리를 단련하시는 주님 앞에 정금과 같이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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