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강도사 / 막 7:24-37

◎본문: 막 7:24-37

◎개요

24-30절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31-37절 데가볼리 사역

◎본문연구

오늘 본문 말씀은 24절부터 30절까지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에 관한 말씀이고, 31절부터 37절까지는 데가볼리 사역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부정하게 여기는 이방 땅으로 옮기십니다. 제자들과 내부 모임을 가졌던 갈릴리 한 집을 떠나 두로 지방의 한 집으로 들어가시죠. 족히 이틀 걸리는 거리를 마가는 순간이동 한 것처럼 간결하게 묘사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갖는 특성 때문입니다. 공생애 동안 예수님의 공식적인 사역 무대는 이스라엘입니다. 이렇게 이방 지역으로 옮기신 것은 일종의 비공식적 사역입니다. 이방 땅 두로로 옮기실 때 예수님은 자신의 방문을 최대한 숨기며 한 집에 은밀히 들어가십니다. 제자들이 동행했겠지만, 마가는 예수님이 홀로 이동하신 것처럼 묘사하여 은밀함을 더해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방문 소식은 금세 퍼졌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초반부터 다양한 지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미 두로와 시돈 사람들도 그 그룹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24절 끝에 숨길 수 없더라 이 표현에서 이미 예수님의 소문이 갈릴리를 넘어 이방 땅까지 퍼졌음을 알 수 있는 것이죠.

마가는 새로운 등장인물로 흐름을 신속하게 가져갑니다. 한 여인이 등장을 하는데 비교적 자세한 개인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선 그녀에게 더러운 귀신 들린 딸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여인이 예수님을 찾은 결정적 이유입니다. 이어지는 헬라인과 수로보니게 족속이라는 소개는 그녀가 철저히 이방인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녀의 딸을 사로잡은 더러운 귀신은 자주 등장한 표현으로 유대적 관점에서 보면 부정을 반영합니다. 자연스럽게 오늘 본문 7장의 앞선 단락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녀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다는 데서 두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먼저 소문은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들려주는 자세한 이야기들을 포함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이 자신의 절박한 현실을 해결해 줄 유일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기에 충분했다는 것이죠.

두 번째는 바로 그 예수님이 지금 근처 어느 집에 와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인은 곧장 그 집으로 향했고, 드디어 예수님 발 아래 엎드립니다. 다급하고 절박한 한 이방 여인이 유대인 예수님 발 아래 철퍼덕 엎드린 장면으로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됩니다. 그녀는 딸의 치유를 위해 간구합니다. 마가는 그녀의 돌발 행동에 대한 주변 반응 역시 소개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입술에 모든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죠.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라는 비유적 말씀을 던지십니다. 지금 그 집에서 식사 중인지 알 수 없지만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죠. 여기에서 자녀들은 누구입니까? 곧바로 이어지는 대응어로 개들이라는 단어와 함께 볼 때, 각각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상징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하는 것과 그 다음 이어지는 떡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떡은 메시아가 가져오실 구원, 은혜, 복이며, 그것을 충만히 누리는 것을 배부름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목자없는 양들이 배불리 먹고 남는 오병이어 사건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은 그런 이스라엘의 우선적 권리를 강조하십니다. 이어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과하게 직설적인 이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잔인한 말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방인을 향한 이스라엘의 경멸적 인식을 가감 없이 드러내 보여주시죠. 완곡하게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받을 특권을 취해 이방인에게 주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죠. 그런 가혹한 말씀으로 얼어붙은 분위기와 상황에 여인의 태도가 반전을 만들어냅니다. 여인도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보내신 메시아이므로, 그들이 먼저 복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죠.

이스라엘이 우선적으로 받을 복을 취해 자신에게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듯, 이방인인 자신이 유대인이 받을 복, 부스러기를 조금이라도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죠. 부스러기는 상 아래 떨어진 음식물로 개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인정하면서 자비를 얻을 수 있는 여지를 파고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말에 주목하시죠. 그리고 귀신이 아이에게서 나갔으니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집으로 돌아갔고, 귀신이 나간 자신의 딸을 발견하며 사건은 마무리됩니다. 구원사에서 이스라엘이 갖는 우선권은 분명히 중요합니다. 로마서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죠.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 3:2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하지만 본문에서 그 부분이 여인을 배척하는 경향으로 강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신 여인의 믿음에 초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무지한 자녀들은 떡 먹기를 거절할 것이고, 떡에 권리가 없던 개들은 배불리 먹을 것이라는 점이죠. 이 사건은 향후 펼쳐질 하나님 나라의 청사진을 보여주는 것이죠.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 청사진 안에 들어와 함께 배부름을 맛볼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정결한 것이 부정한 것으로 오염된다는 기존의 세계관을 정면으로 뒤집어 엎어버리십니다. 본문 7장 처음 단락인 부정한 손으로 식사하는 장면에서 더러운 귀신들린 딸을 둔 부정한, 이방인 여인과의 사건, 그리고 청각 장애인을 더럽다고 여기는 침을 뱉어 그의 혀에 대고 고치는 장면으로 사건이 전환됩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기존 세계관을 예수님이 뒤엎어 버리신 것이죠. 부정이라는 개념을 다시 고민하고 바르게 잡도록 해주신 사건이죠.

본문에 등장한 수로보니게 여인은 명성에 손상을 입었습니다.

본문에서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유대인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제자들을 비난한 바리새인의 행동을 모방함으로써, 수로보니게 여인의 명성에 잠시 손상을 입힌 것이죠. 이 사실을 통해 당시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이방인들을 배척했는지 그 배타성을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두 이방인들은 바리새인이나 제자들보다 믿음이 컸음을 우리는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외모로 판단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는 모습이 두 사람에게 있었기 때문이죠. 이방인들을 배척하고, 자신들만 옳다고 여기던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포용을 통해 종말론적 통치가 이 땅에 실현되고 있음을 강력하게 보여주신 사건이죠.

우리는 어디까지 우리의 이웃을 포용하고 허락하고 계십니까?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과 사역이 점차 확장되고 예수님의 다스림이 우리의 삶에 깊숙이 자리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늘 묵상하며,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족과 이웃과 삶의 모든 터전에서 그들을 포용하고 감싸주며,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그래서 한 영혼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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