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막 8:27-9:1


◎ 본문: 막 8:27-9:1
◎ 제목: 주를 따르는 제자가 되려면

1. 본문 개요
    a. 막 8:27-30           빌립보 가이사랴에서의 신앙고백
    b. 막 8:31-33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
    c. 막 8:34-9:1           제자도

2. 본문 관찰
    a. 27-30절: 베드로의 신앙고백
    b. 31-32a절: 고난, 버림, 죽임, 부활을 가르치심
    c. 32b-33절: 베드로의 항변
    d. 34-37절: 자기 부인과 십자가: 복음을 위하여
    e. 8:38-9:1: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3. 적용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 메시아로 아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의 기초’이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함으로 구원을 얻고,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바로 고백에 따른 ‘순종과 실천’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을 ‘그리스도, 주’라고 고백한다 할지라도 그 고백에 합당한 순종과 주님을 따르는 삶이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제자도’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제자라면 그 제자가 따라야 할 도리를 깨닫고 그 길을 걸어가는 순종과 헌신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27절에 예수님은 ‘빌립보 가이사랴’의 여러 마을을 제자들과 함께 머물러 있습니다. 앞선 7:24절부터 지금까지 예수님과 제자 일행의 여정을 보면, 두로와 시돈을 방문한 후에 데가볼리로 내려와서 다시 북쪽 벳새다를 거쳐서 드디어 오늘 본문의 지리적 배경인 약 50km 북쪽 헐몬 산 끝자락에 위치한 ‘황제의 도시 빌립보 가이사랴’에 도착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제자들에게 특별한 가르침을 주려고 하십니다.

    27절 하반절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부르는지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혹은 여느 선지자로 여기고 있음을 제자들이 보고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29절에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그 즉시 베드로는 멋들어진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입니다.’라고 말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틀린 대답입니까? 아닙니다. 바른 대답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베드로를 향하여 함묵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우리 한글 성경에서는 단순히 ‘경고하시고’라고 번역되었지만, 사실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 ‘에피티마오’는 엄히 꾸짖다는 의미입니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고백을 엄히 꾸짖으며 함구하게 하셨을까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지금 그들이 있는 도시를 생각하면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는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빌립’이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헌정하는 의미로 ‘가이사랴’라는 이름을 붙였고, 지중해 연안 도시 가이사랴와 구분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 ‘빌립’을 붙여서 ‘빌립보 가이사랴’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른바 ‘황제의 도시’라 불리는 곳에서 로마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재건할 자’라는 의미에서의 ‘유대 메시아관’을 가라키는 ‘그리스도’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왜곡되어 어떤 모양으로 재생산되지 않도록 주의를 주신 것으로 보여 집니다. 한편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기대하고 있는 바가 다름 아닌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주는 메시아’의 존재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짐작할 수 있는 근거가 다음 말씀에서 나타납니다. 바로 31-33절에 나타난 ‘첫 번째 수난 예고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 말이지요. 31절에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고, 죽임 당하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그 때 32절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에서 ‘항변하매’라고 번역한 헬라어가 앞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말하지 말라 경고할 때 사용했던 ‘에피티마오’라는 동사입니다. 즉, 베드로가 예수님의 멱살을 잡고 ‘엄히 꾸짖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앞선 베드로의 고백과 베드로가 예수님을 거칠게 밀치면서 엄히 꾸짖었다는 내용을 연결해 보면 어떤 그림이 나오는 겁니까? 맞습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 예수’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는 겁니다. 바로 ‘정치적 메시아’이지요.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의 처지를 구명해 줄 수 있는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잘하면 여기 모인 최측근 ‘12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한 자리씩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는지도 모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와 대부분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부르면서 그 ‘명칭’ 속에 저마다의 기대를 담아 두었다는 말입니다. 이 시간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향하여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에, 그 이름에는 우리의 어떤 기대가 담겨 있느냐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자식들 좋은 직장에 취업시켜주고, 좋은 혼처에 결혼시켜주는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의 지위와 명예를 더욱 공고히 하고 혹 추락해 있는 나의 모습이 있다면, 그것을 다시 만회하고 회복시킬 ‘그리스도’로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이 시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저 우리의 소원이 담긴 ‘고백’에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헛된 행동에 대해 33절에 ‘사탄아내 뒤로 물러가라’고 외치십니다. 그런 방식으로 나를 ‘그리스도 취급’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사람의 일’입니다. 사탄의 좋은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는 헛된 모습이라고 강하게 질책을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는 34절부터 9:1절에 이르러 ‘제자도’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핵심은 무엇입니까?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은 반드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로 이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먼저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과 죄를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짊’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 받은 제자로서 감당해야 할 사명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요청을 통해 무엇을 발견합니까? 결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그분만의 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 길을 걸어가시고는 제자들을 향하여 따라올 것을 요청하십니다. 예수님이 먼저 보이신 모범을 온전히 좇겠다는 순종의 마음이 요구됩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스승을 가르치겠다는 태도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만 생각해서 판단하면 안 됩니다.

    로마를 전복시키고, 이스라엘이 힘을 얻으면서 ‘온 천하’를 얻는 것이 바로 제자들의 ‘예수님 그리스도 만들기 프로잭트’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더 중요한 생명을 잃는 길이었습니다.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예수과 예수의 말을 부끄러워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38절에 그러한 너희들을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에 똑같이 부끄러워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속히 제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돌아오라고 요청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도 동일하게 요청하고 계십니다. 이 새벽에 무엇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욕망을 그리스도에게 투영하면 결국에는 실망밖에는 남지 않을 것입니다. 매 순간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주님과 보폭을 맞추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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