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강도사 / 막9:14-29

◎본문: 막 9:14-29

◎개요

14-19절 산 아래 제자들이 마주한 위기

20-29절 믿는 자가 맛볼 능력

◎본문연구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4절부터 19절까지는 산 아래 제자들이 마주한 위기에 관한 말씀이고, 20절부터 29절까지는 믿는 자가 맛볼 능력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전체 이야기의 주제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을 제외한 인물들은 모두 믿음 없는 세대에 속합니다. 제자 공동체는 믿음 없는 세대 가운데서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 요구됩니다. 제자 공동체는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예수님과의 물리적 분리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의 온전한 연합이 기도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가는 중심 주제인 믿음에 기도를 연결합니다. 반면 마태는 믿음을 끝까지 강조하기 위해 기도를 생략합니다. 그리고 누가는 특별히 마지막 부분에 무리의 긍정적인 반응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세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산에서 내려왔을 때, 남은 제자들이 큰 무리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큰 무리에 둘러싸인 제자들이 서기관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었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이 대목을 생략하지만 마가는 9장 11절에 언급한 서기관들과 연계해 등장을 시킵니다. 이어지는 내용에 비춰보면 남겨진 제자들이 적잖게 곤욕을 치렀던 것을 보입니다. 떠들썩한 현장에 예수님과 세 제자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큰 무리가 깜짝 놀라며 달려와 문안을 합니다. 그 다음 이어지는 16절,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라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당히 모호합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예수는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그들과 무엇을 다투었느냐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기에 세 대명사, 그들, 너희, 그들이 누구인지 불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가장 적절하게 해석하는 것은 첫 번째 등장하는 그들과 너희는 서기관들이고, 마지막 등장하는 그들은 예수님의 남은 제자들이라고 해석을 하죠. 왜냐하면 14절의 제자들과 논쟁을 벌인 주체도 서기관들이고 일부 사본에서도 16절의 첫 번째 그들을 서기관들로 읽기 때문입니다. 즉, 16절을 다시 보면,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에게 물었다. 서기관들, 너희는 예수님의 남아있던 제자들인 그들과 무엇을 다투었느냐 이런 질문이 되는 것이죠. 물론 예수님의 물음에 대답은 무리 중 하나가 대답하죠. 무리 중 한 남자가 자초지종을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그에게 말을 못하게 만든 귀신들린 아들이 있는데, 남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치유를 부탁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서기관들과 제자들의 변론은 분명 그 일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 아들을 예수님에게 데려왔고, 아이의 심각한 상태를 자세히 말합니다. 귀신이 아이를 붙들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다 온몸이 파리해졌습니다. 흡사 간질병과 같은 증세여서 그런지 마태는 17장 15절에 간질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는 그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려갔지만 치유할 수 없었습니다. 큰 무리와 서기관들까지 모인 자리에서 제자들이 적잖게 당황스러워했을 것입니다. 산 위에 세 제자들은 무지했고, 산 아래 남은 제자들은 무능했습니다. 특히 예수님 없이 있었던 산 아래 제자들에게 커다란 도전의 시간이었겠죠. 그 사람의 말을 다 들으신 예수님이 책망조로 두 질문과 명령을 하나 건네십니다.

책망의 대상은 믿음이 없는 세대와 너희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누구인지 또다시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문법적으로는 그 사람과 아들, 무리와 서기관들, 그리고 제자들 모두 가능합니다. 제자들은 믿음이 부족했고 서기관들은 적대적이었으며 무리는 불신했다면, 사실상 모두를 믿음이 없는 세대로 칭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모두에게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책망으로 가장 마음이 무거웠을 대상은 다름 아닌 제자들이었을 것입니다.

마가는 귀신이 예수님을 보았다고 묘사합니다. 그러자 아이의 몸이 다시 경련을 일으켜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립니다. 그의 아버지가 앞서 묘사한 것에 구르며라는 단어가 추가됩니다. 아이의 비참함의 근본적인 원인은 귀신임이 분명해졌습니다. 귀신은 아이의 몸을 마음껏 통제하며 파괴적인 권세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었죠. 그렇게 아이가 고통하는 상황에서 뜻밖에도 예수님은 아이의 아버지에게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물으십니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고통의 세월을 지나왔는지 상태의 심각성은 이어지는 아버지의 고백에서 더욱 뚜렷해지죠. 귀신이 아이를 죽이려 불과 물에 자주 던졌다고 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할 수 있거든 무엇이든 자신과 아이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는 말은 뭐든 좋사오니라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절박감과 이분은 무엇이라도 하실 수 있을 것이야라는 옅은 기대감, 그리고 혹시 제자들처럼 이분도 고치실 수 없다면 이라는 의심까지 다양한 감정이 섞여 있는 문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부분을 꼬집어 다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라고 질문을 던지십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의 불안한 모습을 질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선언하시면서 믿음으로 초청하시는 것이죠. 문제 해결을 얻기 위한 전제로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는 자가 얻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의 말씀에서 한 줄기 빛을 보았습니다. 주저 없이 내가 믿나이다라는 고백을 하죠.

아이의 아버지의 고백은 예수님 당신이 고치실 것을 내가 믿나이다 가 아니라 자신의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하셨는데, 바로 자신이 거기에 속한 자라고 고백한 것이죠. 믿음 없는 세대에서 믿음의 자리로 나오는 것은 스스로 믿음 없음을 인정하고 믿는 대상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태도를 가진 인생에 믿음을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시죠.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을 향해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나오라와 들어가지 말라는 명령이 뒤따릅니다. 악한 영으로부터 완전하고 지속적인 해방을 선포하시죠. 귀신의 반응은 즉각적이었습니다. 아이에게 심한 경련을 일으켜 쓰러뜨렸고 아이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아이의 죽음을 확정하는 믿음 없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행동하십니다. 죽은 자처럼 쓰러져 있는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자 소년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본문 마지막 부분에 제자들이 자신들은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지 묻자, 예수님께서 기도 외에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고 가르쳐주십니다. 권세는 자격증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권세를 주신 예수님과의 온전한 연합과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쓸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 연합의 관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이 기도인 것이죠. 물론 기도 역시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수단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인 것이죠. 예수님과 관계, 연합의 관계가 항상 좋아야 하는 것이죠. 예수님과의 연합, 이 관계가 날마다 더 깊어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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