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막 9:30-37


◎ 본문: 막 9:30-37
◎ 제목: 같은 길을 걷는 제자

1. 본문 개요
    a. 막 9:30-32           두 번째 수난 예고
    b. 막 9:33-37           제자들 사이의 논쟁

2. 관찰
    a. 30절:   은밀하게 갈릴리를 방문하신 예수님과 제자들
    b. 31-32절: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고난 받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설명하실 때 제자들이 보이는 반응
    c. 33-34절:   서로 누가 큰지를 논쟁하는 제자들
    d. 35-37절:   어린아이를 통해 제자들에게 섬김의 교훈을 주시는 예수님

3. 적용
    ‘제자’는 선생의 길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우리말 ‘제자’로 번역된 헬라어 ‘마데테스’는 ‘배우다, 가르침을 받다, 깨닫다’는 뜻의 동사 ‘만다노’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즉 ‘배우는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하지만 성경에서 제자는 단순히 배우고 학습하는 학생 정도로 이해하기 보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가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깨달으며 자기 행동의 지표로 삼는 자, 곧 스승의 철저한 추종자를 의미합니다. 그야말로 ‘가르침을 받은 대로 행하는 자’가 바로 ‘제자’입니다.

    그런데 만약 제자의 가치관과 행동이 선생과 전혀 좁혀지지 않는, 마치 평행선을 긋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면 우리는 과연 그를 ‘제자’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본문에서 보이는 제자들의 태도는 ‘과연 이 사람들을 예수의 제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참 제자가 보여야 할 태도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은 악한 귀신 들린 한 소년을 치유하면서 현장에 있는 무리들을 향하여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28절에 ‘집’이라는 사적인 공간에 들어와서는 제자들을 향해 ‘기도’의 중요성을 교훈하셨지요. 예수님과 제자 일행은 오늘 본문 30절에 그 곳을 떠나 다시 갈릴리로 들어가 순회합니다. 앞선 8:27절 이후 갈릴리로의 첫 방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갈릴리로 돌아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이후에 이어지는 내용을 살펴보면 이해가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갈릴리’를 중심으로 북쪽과 동쪽을 순회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제 갈릴리 남쪽을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실 겁니다. 그 일을 앞두고 다시 갈릴리로 오셔서 공개적인 사역이 아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는’ 사적인 시간을 통해 제자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전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초점은 다름 아닌 제자도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로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고난과 피로 죄를 대속하고 언약을 세워 하나님 나라를 도래하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다시 제자들에게 상기시킵니다. 아지만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메시아적 고난과 죽음’에 관해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예고’는 아예 귀에 들어오지도 않은 듯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여정에서 경각심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 과장법으로 이야기하신다고 여겼습니다. 절대 메시아의 죽음은 현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여겼습니다. 이건 단지 힘겨운 여정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더 정신 차리라는 일종의 ‘정신교육’이라고 믿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혹시 진짜일까 봐 예수님께 묻기도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야마로 ‘동상이몽’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분명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걷고 있습니다. 하지만 같이 걷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을 제자라 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의 제자는 예수님과 같은 길을 가는 자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제자들이 하기 두려워했던 ‘예수님, 정말 돌아가시는 거 맞나요? 정말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셔야 하는 건가요?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게 정말 맞습니까?’라는 이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질문도 해야 겠지요. ‘예수님! 예수님 걸어가신 것처럼 저도 그 길 가야 되는 게 맞나요?’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질문을 예수님께 드릴 수 있고, ‘그래 나와 함께 가자’는 예수님의 답에 응답할 수 있어야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입니다. 기꺼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내어 미시는 ‘쉽고 가벼운 멍에’를 질 때에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만나게 됩니다. 만약 내가 기대한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이 가져 오신 하나님 나라가 다르다면, 우리가 ‘믿음’이라 하는 것은 단지 ‘나의 신념’일 뿐이고, 자기 최면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내 생각을 온전히 내려놓고 ‘주님의 제자도’에 충성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33절 이하에는 제자들의 ‘논쟁’이 언급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십자가를 말하면서 함께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누가 큰지를 두고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십자가 죽음을 생각하고 있을 때, 제자들은 세상 나라 식으로 높은 자리를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35절에 세상의 방식과는 다르게 하나님 나라에서 첫째 자리는 뭇 사람을 섬기는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시고, 36-37절을 통해 어린아이 하나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는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제자도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기꺼이 ‘주님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는 낮아짐’과 ‘가장 연약한 자를 배려하는 섬김’입니다. 이 두 가지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세워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원리는 다름 아닌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원리가 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를 스스로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나는 공동체 안에서 어떤 화제를 가지고 이야기하기를 즐기고 있습니까? 세상의 욕망을 따라 자신에게 유익을 주는 것을 많이 말하고, 그 것에 귀 기울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섬김과 사랑을 말하고 이야기하며 실천하고 있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아무 에게도 기댈 수 없는 힘없고 낮은 자들의 친구가 친히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도 그러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더욱 연약한 지체를 돌아보고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새벽에 나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세상의 관심은 오로지 ‘물질적으로 잘 되는 일’에 있습니다. 방송과 유튜브, SNS 등을 보시면, 결국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 수 있는가에 관심이 쏠려 있는 세상의 모습을 봅니다. 어떻게 하면 잘 나갈 수 있을까에 모든 관심을 쏟습니다.

    예수의 제자인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마음과 생각이 예수님께서 지향하신 그 방향을 따라 향해야 합니다. 단지 내 입술의 고백이 ‘예수를 주’라 고백하기 때문에 나의 거듭남과 제자 됨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마음과 생각의 지향점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가 나의 ‘예수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끝없이 떠오르려 하는 ‘잘 되고자 하는 욕망과 욕구’에 붙잡혀서 사랑 대신 경쟁을 택하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 나라에 역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시간 죽기까지 낮아지신 주님을 따라 섬기는 자리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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