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강도사 / 막 10:1-12

◎본문: 막10:1-12

◎개요

1-9절 바리새인들의 시험과 예수님의 가르침

10-12절 제자들을 위한 추가 가르침

◎본문연구

오늘 본문 말씀 1절부터 9절까지는 바리새인들의 시험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관한 말씀이고, 10절에서 12절까지는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추가 가르침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신 후, 유대 지경을 지나 요단강 건너편 공적 장소로 이동하십니다. 동선은 유대인들처럼 사마리아를 우회해 요단 동편으로 내려가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로 들어가는 행로입니다. 유대 지경을 지나 요단 동편으로 건너가시죠. 요단 동편은 헤롯 안티파스가 통치하던 데가볼리와 베레아 지역입니다. 앞서 7장에, 예수님은 데가볼리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다시 다시 데가볼리에 이르렀을 때 무리가 모여든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죠. 무리를 마주하신 예수님은 늘 그러셨듯이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때 갑자기 바리새인들이 등장을 합니다.

그들이 제기한 질문은 이혼의 문제였습니다. 정황상 이례적이긴 하나 마가복음에서는 매우 민감한 주제이죠. 세례 요한의 죽음이 이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죠. 마가는 바리새인들이 이 주제를 끌고 들어온 목적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밝힙니다. 만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에 빠뜨리려고 질문했다면, 그들은 세례 요한의 비극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며, 예수님도 정치적 위기에 몰아넣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의 부정한 이혼과 재혼을 날카롭게 비판했고, 그 결과 참수라는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취하기 위해 자신의 아내를 버리기까지 했던 헤롯 안티파스의 행위는 선지자 세례요한의 눈에 옳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질문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는 그런 배경을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죠. 더욱이 본 사건의 무대는 헤롯 안티파스가 통치하는 땅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세례 요한과 입장을 같이한다면 가뜩이나 예수님으로 인해 심기가 예민한 헤롯 안티파스의 폭력에 빌미를 줄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이혼을 허용한다면, 헤롯의 불의를 용인하는 셈이 되죠. 이혼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매우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어떤 식으로든 예수님의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하도록 강요했던 거죠. 하지만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하십니다.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들에게 가장 명료한 기준은 모세의 율법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모세가 어떻게 명령하고 있는지 물으신 것입니다.

그들은 반사적으로 신명기 24장 말씀을 근거해서 이혼 증서를 써주기만 하면 아내를 버릴 수 있다는 자의적 해석을 꺼내놓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모세의 명령을 이혼 허용의 합법적 근거로 삼았습니다. 신명기 24장 1절 말씀에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라고 말씀하는데, 이 수치되는 일이라는 모호한 기준을 마음대로 넓혀서 해석했고, 모세가 허용할 수 밖에 없었던 근거와 명분은 살피지 않고 자신의 성적 욕망을 누릴 법적 근거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던진 질문의 의도와 입장을 간파하시고 모세가 어떻게 명령했는지 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세가 이혼 증서를 통한 이혼을 허용한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본문 5절인데, 여기에서 핵심 단어는 완악함이라는 단어입니다. 모세의 이혼 허용은 일반적 허용이 아닌 최소한의 허용인 것입니다. 즉, 이혼을 완전히 금한다면 그것을 지킬 수 없는 부득이한 상황은 율법의 정신에 모순을 유발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간음이나 음행, 심한 폭행, 생명의 위협을 느낄만한 그런 것들로 인하여 이혼을 부득이하게 해야 하는데, 율법에서 무조건 하지 말라고 한다면, 충돌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그런 까닭에 모세는 특별한 사유에 한해 최소한의 허용을 명령한 것입니다. 그렇게 허락한 이유는 최대한 이혼을 금해서 가정을 온전하고 거룩하게 보전하기 위해서인 것이죠.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혼을 어렵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허용을 어떻게 합니까. 오히려 거꾸로 최대한 활용해서 쉽게 이혼하는 폐해를 낳게 됩니다. 피해는 고스란히 약자인 여인들의 몫이 되어버렸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여인들을 보호하는 울타리였습니다. 그러나 남편들은 성적 욕망과 탐심에 아내들을 울타리 밖으로 내쫓고, 모세 율법으로 그런 행위에 대한 명분과 근거를 확보했던 것이죠.

1세기 당시 바리새파에 샴마이 학파와 힐렐 학파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샴마이 학파는 강성파이고, 힐렐 학파는 온건파라고 보시면 됩니다. 온건파인 힐렐 학파는 모세의 이혼 허용을 최대한 확대해서 사사혼 일로도 아내를 버릴 명분을 제공했습니다. 대부분 이혼은 어떤 식으로든 자기 아내를 버리고자 하는 남편의 죄악된 마음에서 비롯되었죠. 예수님은 인간의 이 같은 태도와 마음을 완악함이라고 정의하십니다. 모세의 명령은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최대한 이혼을 금하기 위한 불가피한 최소한의 허용이지, 보편적 허용이 아니었습니다. 부부에 대한 하나님의 최초 명령은 사실 이혼의 여지를 조금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신명기보다 앞선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지으실 때 주신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부모를 떠난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통해 서로 연합해 한 몸이 된다는 창세기 2장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그 둘을 창조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또 하나가 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다라고 말씀하시죠. 창조 때 하나님이 둘을 하나로 만드심이 결혼의 근본 원리와 의미이기에, 결코 사람이 결혼을 파기하며 둘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이죠. 온전하신 하나님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완악한 인간이 나눈 것이 이혼이라는 차원에서 예수님의 근본적 입장은 이혼 금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 되게 하고 둘로 나누는 주체로 하나님과 사람이 대조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의 의미를 강조하시지만, 바리새인들은 전통과 왜곡된 율법 이해에 근거한 이혼의 명분에 집중했습니다. 모세가 부득불 아내 버림을 최소한으로 허용했지만, 본래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의 시험에 예수님은 걸려들지 않으시죠.

둘이 하나가 되게 하심, 즉 남자가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인데, 이것을 연합이라고 합니다. 로마서에서는 우리를 예수님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 예수님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연합은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성경에서 참 중요한 단어 중 하나가 연합이라는 단어입니다. 남자와 여자, 신랑과 신부, 성도와 예수님, 이런 연합이 참 중요한 의미로 성경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짝지어진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었다가 다시 둘로 나눈다는 것은 예수님은 금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다 지킬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아담 이후 타락한 모든 인류에게는 죄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을 다 지킬 수 없게 되었죠.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이혼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모세가 명령한 것처럼 정말 간음이나 음행, 목숨의 위협, 극심한 폭력 등 이런 걸로는 이혼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이죠. 오히려 이혼을 안해서 목숨이 위태롭고 신앙도 지켜내지 못해서는 안됩니다. 그 말은 최대한 극심한 위기가 올 때까지는 그래도 참고 또 참아봐야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지금 이 시대는 화가 많은 시대이고, 참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성격의 차이, 다름의 차이, 여러 가지 이유를 찾아서 이혼을 하는 그런 시대입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자신의 성적 욕망을 위해서 이혼의 사유를 찾아 이혼하는 모습과도 흡사한 시대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바르게 깨달아서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그 뜻을 실천하는데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서 행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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