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막 10:32-45


◎ 본문: 막 10:32-45
◎ 제목: 제자가 구해야 할 영광

1. 본문 개요
    a. 막 10:32-34           예루살렘 길에서 주신 세 번째 수난예고
    b. 막 10:35-45           섬김을 위하여 오신 인자


2. 본문 관찰
    a. 32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
    b. 33-34절: 세 번재 수난예고
    c. 35-37절: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
    d. 38-40절: 예수가 마시는 잔과 받는 세례
    e. 41-45절: 제자들의 다툼과 섬김의 제자도


3. 적용
    ‘아브라함 마슬로우’라는 사회심리학자는 인간에게 총 5단계의 욕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가장 위에 있는 5단계의 욕구는 다름 아닌 ‘자아실현의 욕구’입니다. 인간은 기초적인 의식주, 소속감 등의 욕구가 채워지면 ‘진정한 자신을 찾아 성숙하게 완성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자아실현의 욕구’는 결국 ‘영광을 얻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자신을 찾은 사람은 이 세상 어느 것도 부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빛이 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모든 인생은 영광을 원합니다. 자신이 드러나기를 원한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영광을 구하는 마음 자체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어떤 영광을 어떤 방식으로 추구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세상 영광을 구한다면 패망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이라면 ‘영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구하신 영광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제자가 구해야 하는 영광은 또한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본문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본문 32-34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세 번째 수난예고를 하시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예루살렘은 지형적으로 높은 곳으로 있기 때문에 32절에 나타난 것처럼 ‘올라가는 길’ 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지리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올라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바이노’는 신앙적 열망을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있는 예루살렘에 오르는 것을 늘 열망했습니다.

    그 길을 예수님은 오르고 계십니다. 특별히 마가는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신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제자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였다고 덧붙입니다. 묻기도 두려워하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까워 오자 놀라고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어떠할 것인지에 대해 33-34절을 통해 아주 상세하고 정확하게 설명하십니다. 이 죽음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명입니다.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길이며, 대적들의 악함아 온전하게 드러나는 통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름 아닌 ‘부활의 영광’을 얻게 되십니다. 주님이 구하시는 영광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이며, 그 길이 십자가 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주저 없이 그 고난에 순종하시기 위해 예루살렘 길로 올라가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취하시려는 영광은 어떤 영광입니까? 그 영광은 도무지 세상이 추구하는 영광과 방향이 맞지 않습니다. 세상은 ‘살아남아서 얻는 영광’을 취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죽어야만 얻을 영광’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얻으려 하시는 영광은 반드시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해야 하는 영광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관점에서는 꺼려지는, 도무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영광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놀라고, 두려워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자들의 대부분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우리를 정치적으로 구원할 ‘다윗의 계열’의 ‘유다의 사자’ 메시아 예수로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은 온 인류의 온전한 구원 사역입니다. 그 것만이 참된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성자 예수에게 그 영광을 취하라고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참 제자는 바로 그 예수의 영광을 사모하며, 그 길을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인생 낭비하지 말고, 헛된 영광 구하지 말고 주님 따라 참 영광을 구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분명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길은 ‘죽음의 길, 십자가의 길’이라는 사실을 설명하셨습니다. 그런데 35절에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여전히 ‘헛된 영광’을 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 나아와서는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한다’고 예수님께 아뢰고는 36절에 그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힙니다. 다름 아닌 자신 둘을 하나는 예수님 우편에, 다른 하나는 좌편에 앉혀 달라는 요구입니다. 자기들에게만 독점적으로 영광의 좌우편을 달라는 요구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더 낮은 길로, 지기를 희생하여 남을 살리는 길로 가시는데, 그분의 제자라는 작자들은 점점 더 높은 길로,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길로 가려고 하니 말입니다. 여전히 예수님이 어떤 메시아인지에 대해 오해한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의 요구에 대해 38절에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고 반문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해서 ‘너희들 나 죽으러 가는데, 같이 가서 죽을 수 있어?’ 이 말 아니겠습니까?

    이 두 제자도 답답하지만, 그들이 예수님께 요구한 내용을 알고서 분개하는 다른 제자들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두 사람의 요구에 대해 분노합니다. 왜 이들은 분노합니까? 그들의 마음에도 같은 욕망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국을 재현할 ‘유다의 사자’로 이 세상에 오신 줄 알았는데, 죽을 자리 보러 간다고 계속 말씀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답답해 죽겠는데, 같은 동료가 다시 ‘오른편 왼편’하고 있으니 화가 난 겁니다. 자신들의 욕망도 이내 들켜버렸습니다.

    결국 깨닫게 됩니다. ‘참 영광을 구하는지 아닌지을 판단하는 시금석’은 바로 ‘고난을 받아 들이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음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끊임없이 보여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세상 나라의 지배와 통치 방식의 원리와는 정 반대로 역행하는 나라입니다. 군림하고 정복하는 나라가 아니라 고난당하고 대신 죽어주고 모든 것을 내어주는 나라입니다. 섬김과 희생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나라라는 말입니다.

    그 나라의 구성원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길을 함께 걸어 가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결국에 얻게 되실 ‘참된 영광’에 함께 참여하는 자가 제자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영광을 원한다면 마땅히 소유하고 과시하고 주장하는 자세가 아닌 버림과 비움과 내어줌을 실천하는 자로 서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마음에 새겨야 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보좌 우편에 앉기 원했던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의 마지막은 어떠하였습니까? ‘최초의 순교자’라는 타이틀을 얻었습니다. 좌편을 원했던 요한은 어떻습니까? 전승에 의하면 요한은 잡혀서 뜨거운 물에 끓여서 죽이는 형벌 속에서도 결국 살아남아서 ‘밧모 섬’에 유배 되었다고 하지요. 그 곳에서 요한계시록을 쓰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교회를 위한 섬김과 수고를 다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시작은 ‘세속의 헛된 영광’을 추구함이었으나 하나님은 결국 그들을 ‘고난과 버림과 비움의 길’을 통한 참된 영광의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이 새벽에 나는 어떤 영광을 취하기를 원하는지 스스로 돌아보고,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이를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마음이 새겨 예수 제자의 삶을 실천하기로 다짐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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