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강도사 / 막 10:46-52

◎본문: 막10:46-52

◎개요

46-47절 여리고 맹인 거지 바디매오

48-50절 바디매오를 부르신 예수님

51-52절 믿음으로 보게 된 바디매오

◎본문연구

오늘 본문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46절과 47절은 여리고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등장을 하고, 48절에서 50절은 바디매오를 부르신 예수님 그리고 51절과 52절은 믿음으로 보게 된 바디매오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 일행은 요단 동편 데가볼리와 베레아를 지나서 내려오다가 이제 다시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에 도착하게 됩니다. 여리고는 요단강 서쪽으로 약 8킬로미터, 예루살렘 북동쪽으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저지대이며, 고대 도시입니다. 해수면보다 낮은 여리고는 예루살렘과 약 1킬로미터의 고도 차이가 있습니다. 유월절이 가까운 당시 여리고는 예루살렘을 향해 뻗은 오르막길에 순례객들로 가득 찼습니다. 마가는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일행과 여리고를 통과해 빠져나가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마가의 기사를 따르지만 누가는 다른 시점을 제시합니다. 누가는 이어지는 바디매오 사건이 여리고를 떠날 때가 아니라 입성 시에 있었다고 전합니다. 왜냐하면 여리고 성 내에서의 또 다른 특별한 만남, 삭개오 사건과 같은 특별한 만남으로 서사를 연결하기 위한 누가의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일행과 큰 무리가 여리고를 빠져나갈 무렵, 길가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마가는 그를 바~디매오, 디매오의 아들이란 뜻이죠, 그리고 맹인이며, 거지로 비교적 자세히 소개합니다. 그가 맹인이 된 원인이 소개되지 않으나 아마도 나면서부터 그랬을 것으로 추정을 합니다. 바디매오는 평생 구걸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가야 했던 비참한 사람이었습니다. 46절에서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아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길 가는 바디매오가 사람들로부터 거절과 은혜를 맛보아왔던 치열한 생계 현장인 것이죠. 특별히 유월절같은 대명절에 바디매오는 거절보다 은혜를 더 많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더불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수입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을 경건하게 오르는 순례객들은 그 어느 때보다 넉넉한 마음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마태는 바디매오 대신 맹인 두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바디매오에게 그 때는 한 해 중 가장 큰 자비를 기대할 수 있었던 은혜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순례객들의 자비가 넘쳐나도 그의 비참한 길 가 현실과 운명은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는 길 가에서 구걸의 삶,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길을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이죠. 누군가 무심코 외친 한 문장이 그의 귓전에 울려 퍼집니다. 나사렛 예수다.

이 문장이 바디매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마가복음에서 지금 예수님은 여리고 첫 방문이십니다. 이렇게 아래 지방까지 내려오신 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소문이 자주 걷잡을 수 없이 퍼진 사실들을 고려한다면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소문을 분명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심 언젠가 유대인 예수님이 순례객으로 이 길을 지나기만을 바랬을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 속에 담아둔 유일한 희망의 이름 바로 나사렛 예수, 예수님이 지척에 있다는 외침을 놓칠 수 없었습니다. 시력을 잃었지만 누구보다 청력은 뛰어는 바디매오였습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놀랍게도 바디매오는 나사렛 예수를 다윗의 아들 예수로 고백합니다. 나사렛 예수의 비범한 소문이 그를 다윗의 아들, 자비를 베풀어 이스라엘을 회복할 메시아로 이해하게 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다윗의 아들로 예루살렘 길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비록 맹인이지만 바디매오는 아무도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의 정체성을 마음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바디매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토록 열망해온 다윗의 아들 예수, 바로 그의 자비인 것이죠.

제자들과 큰 무리가 예수님을 둘러싸고 북적북적한 순례행렬이 진행되는 가운데 바디매오의 목소리가 쉽사리 예수님에게 당도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더욱 큰 소리로 외칩니다. 그때 많은 사람이 바디매오를 꾸짖어 조용하라고 제지합니다. 앞서 제자들이 아이들을 꾸짖듯, 많은 사람이 바디매오의 외침을 금하고 있는 것이죠. 무리의 이런 행동은 앞 단락의 제자들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들 역시 지금 예수님이 엄청난 일을 하기 위해 예루살렘 길을 오르고 있고, 바디매오는 이 높으신 분의 행차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무리의 꾸지람에도 불구하고 바디매오는 더욱 큰 소리를 외칩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디매오의 간절한 외침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춰 세웁니다.

앞서 예수님은 그가 가시는 예루살렘 길의 성격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높은 자리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를 섬기는 종의 길이라고 말이지요. 제자들을 포함해 무리에게 예수님은 가장 높은 자리로 오르시는 영광스런 다윗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은 자신과 같은 가장 미천한 자의 자리까지 내려오실 수 있는 자비 많은 다윗의 아들인 것이죠. 예수님이 가던 발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시켜 바디매오를 자기 앞으로 부르십니다. 잠잠하라고 바디매오를 꾸짖던 그들이 이제 바디매오를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는 자들이 됩니다. 그들이 전한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는 말은 바디매오가 지금까지 들었던 말 중 가장 따뜻한 말이었습니다.

심장을 흥분시키는 가장 위대한 초청에 바디매오는 겉옷을 던져버리고 뛰어 일어납니다. 겉옷은 그의 유일한 보호 장구이자 사람들이 던져주는 동전받이로 쓰였을 만큼 구걸에 필수품이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바디매오가 자신의 겉옷을 버렸다는 것은 사실상 소유 전부를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앉아 있던 바디매오가 폴짝 뛰어 일어나,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예수님이 너는 내가 너를 위해 무엇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 부르며 보기 원한다고 대답하죠.

여기에는 당신은 내 눈을 뜨게 해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라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즉 다윗의 아들인 나사렛 예수는 자신의 눈을 뜨게 해줄 유일한 분이라는 믿음의 고백인 것이죠. 바디매오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앞서 다양한 치유 행위와 달리 그저 단호하게 가라는 말씀으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보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바디매오의 고백에서 믿음을 보시며 곧바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자 즉시 바디매오가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시는 그 길을 따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뭇 비교가 됩니다. 눈이 어두운 제자들,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기회로 밖에 생각하지 못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섬김을 받기 위해 높아지기를 바라던 제자들은 권력에 눈이 멀었지만,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높으신 분의 섬김을 받은 바디매오는 눈을 뜹니다. 바디매오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비참한 삶을 벗어나 새로운 존재로 예수님의 그 길, 수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제자가 됩니다. 참된 제자는 스승이신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참된 믿음을 가지고 뒤따르는 존재입니다. 제자들보다 더 제자로서의 바디매오는 가장 이상적인 제자 모델로 등장을 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의 대한 이해와 예수님을 따르는 태도에서도 모범이 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제자로서, 예수님을 바르고 깊이 이해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그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그래서 모범이 되는 우리의 모습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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