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막 11:1-11


◎ 본문: 막 11:1-11
◎ 제목: 나귀 타고 임하는 나라

1. 본문 개요
    a. 막 11:1-6           예루살렘 입성을 위한 준비
    b. 막 11:7-11           예루살렘 성전 입성

2. 관찰
    a. 1-3절: 베다니에서 나귀 새끼를 위해 제자 둘을 보내심
    b. 4-6절: 나귀 새끼를 구해 옴
    c. 7-10절: 나귀 타신 예수와 무리의 환호
    d. 11절: 성전을 둘러보시는 예수님

3. 적용
    파리에는 ‘개선문’이 있습니다. 이 문은 나폴레옹이 자신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정작 이 개선문을 나폴레옹이 살아생전에 통과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그가 죽은 후에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2차 세계 대전 때 독일의 점령으로부터 파리를 해방시킨 ‘드골 장군’이 개선문을 통과하였습니다.

    개선문에는 나폴레옹과 함께 전투를 치른 장군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나폴레옹이 이끌어 이긴 수많은 전쟁들의 영광스러운 장면들이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이처럼 언제나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고, 위엄을 보이려고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모습이십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난 것처럼 그분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보통 왕이라면 ‘말’을 타고 입성합니다. 말은 ‘전쟁’을 의미하고, ‘힘’을 상징합니다. 반면 ‘나귀’는 ‘겸손과 평화’를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처럼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고 계십니다. 그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개선문’이 아닙니다. 그분에게 준비되어 있는 것은 ‘가시 면류관과 십자가’만 있습니다. 그것을 온전히 받으시기 위해 주님은 ‘겸손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발을 내딛습니다.

    예수님 일행은 지금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습니다. 거리상으로는 예루살렘에서 3km정도 떨어진 지점입니다. 2절에 예수님께서는 그 곳에서 두 제자를 맞은 편 마을로 보내셔서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고 풀어 끌고 올 것을 명령하십니다. 여기에서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는 스가랴 9:9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강조하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아무도 타 보지 않았다.’는 것은 특별한 대상과 목적을 위해 구별된 것임을 암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약에 누가 왜 나귀 새끼를 풀어 가느냐고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할 말까지 제자들에게 알려주십니다. 실제로 4-6절을 보니 제자들이 나귀를 풀려고 할 때에 제지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에게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주가 쓰실 것이다.’라고 하니 그냥 허락을 받게 됩니다. 암호를 주고받은 냥 신비로운 일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3년여의 공생애 사역을 뒤로하고 마지막 일주일, 가장 위대한 사역을 앞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갈릴리에서 부름 받은 제자들은 여기까지 잘 따라왔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세 번의 수난 예고를 들었지만, 사실 제자들은 앞으로 몰아칠 폭풍과 같은 일주일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제자들은 익숙한 대 명절의 분위기에 취했고 더불어 예수님에 대한 특별한 기대감으로 들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 이사야 선자자의 예언대로 ‘고난 받는 종’으로 인류를 위한 가장 위대한 섬김의 일주일을 내다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그 ‘겸손의 사역’의 시작으로 제자들에게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를 준비하라고 요청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비록 들떠 있으나, 예수님의 명령에 군말 없이 순종합니다. ‘주가 쓰시겠다.’는 말에 사람들도 제자들이 나귀를 가져가게 허락합니다.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결국 ‘예수의 제자’는 각자의 삶에 들어오셔서 ‘주가 쓰시겠다.’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명령에 무엇이든 주께서 쓰시도록 내어드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나 자신이 주님의 사용하시기에 가장 편리한 도구가 되도록 하락하는 자가 바로 제자입니다.

    나의 삶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에 편하게 준비되고 있는 삶인지 스스로 돌아보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모양으로든 우리는 다 하나님의 쓰임새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 것을 기억한다면 매 순간 내 삶에 어떤 것이라도 주님께 드리겠다는 헌신의 마음을 준비함이 옳습니다. 어느 것도 내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다 주님의 것이기에 요청하시면 드리겠다는 다짐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드디어 7절에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얹어 놓고 예수님이 타십니다. 그러자 8절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사람들은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따릅니다. 하지만 세상의 왕들의 등장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겸손과 평화로 임하는 나라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십자가의 섬김으로, 친히 성전이 되시고 제물이 되시고, 제사장이 되실 메시아 예수님은 제자와 무리들의 기대와는 달리 정치적인 왕이 아니라 겸손과 섬김의 왕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의 참 모습은 ‘힘’의 과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겸손과 섬김의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세상 나라는 권력과 힘으로 영광을 구한다면 주님 나라는 낮아짐과 섬김의 희생으로 세워져 가는 나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제자인 거룩한 성도는 언제나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잘 바라보고, 그 발자취를 따라 가야하는 사람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마음 한편에는 늘 내가 더 드러나고자 하는 욕구와 욕망이 있습니다. 멋진 개선문을 만들어 자신의 승리에 취하고, 그 승리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죄 된 본성을 가진 인간의 본래 모습입니다. 예수의 제자는 그 본성을 거슬러야 합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은 시작됩니다. 나는 내 삶의 자리에서 얼마나 누군가를 더 존중하고 높여주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람들은 압제와 가난 속에서 구원의 열망을 담아서 소리를 지릅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최고의 찬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셔서 공의로 구원을 베푸시되,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고 오신다는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대로 주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스가랴의 예언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전을 세우는 메시아가 바로 자신이심을 나타내십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하고 바라는 대로 군사적 정치적 힘과 능력으로 나라를 세우시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세우는 사역이 될 것임을 보여주십니다.

    주님의 구원은 이스라엘의 회복만이 아닌 온 세상을 죄로부터 건지는 구원입니다. 만물이 새롭게 되고 잃어버린 인간의 영광을 되찾는 구원입니다. 이것은 지금 ‘호산나’를 외치는 군중들의 머리 속에 그리고 있는 ‘영광’이 아닙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이렇게 목소리 높여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들의 목소리는 온갖 고난과 모욕을 당하신 후, 빌라도가 ‘어떤 처분을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십자가에 못 박으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소리로 바뀌게 되지 않습니까?

    이 새벽에 우리들의 모습도 돌아보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 그분의 제자,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라 하면서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바라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혹 내가 지금 외치고 있는 찬양과 경배는 마음으로는 세상적인 ‘영광’을 향하면서 겉으로만 겸손과 헌신’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합시다. 우리 주님은 칼의 권세로 오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의 힘과 평화의 왕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섬김과 희생으로 사랑과 평화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가 부와 영광을 추구할 때 힘을 잃고 변질된다는 것을 교회의 역사, 특히 중세 교회의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보이는 영광’으로 하나님 나라를 대신하려 하는 유혹을 버리고 나귀 타신 주님을 기억하며 겸손과 섬김의 삶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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