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막 11:27-12:12
◎개요
11장 27-33절 성전에서 첫 번째 논쟁(권위에 대한 논쟁)
12장 1-12절 포도원 농부의 비유(권위에 대한 비유)
◎본문연구
오늘 본문 말씀은 두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먼저 11장 27절부터 33절까지는 성전에서의 첫 번째 논쟁에 대한 내용인데, 특별히 권위에 대한 논쟁이고, 12장 1절부터 12절까지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인데, 권위에 대한 비유로, 이렇게 두 단락으로 본문을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갑니다. 전날 예수님의 한바탕 소동에 모두가 적잖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자리를 예수님이 다시 거니실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 예수님 앞에 나옵니다. 전날의 보고를 다 받고 극도의 적대감을 품은 상태로 예수님을 마주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면밀히 관찰했을 것이고, 그가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의 첫 번째 논쟁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도대체 무슨 권위로 그런 일을 했으며, 그 권위는 누가 준 것이냐는 질문이죠. 여기에서 이런 일은 바로 전날에 있었던 성전 뜰의 소동을 의미하겠지만 포괄적으로는 예수님의 사역 전체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죠. 그들이 이처럼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그동안 예수님이 보인 일련의 행동이 권위의 문제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입니다. 당시 권위는 종교지도자들의 종교적 전유물이었는데, 그들이 허락하거나 부여하지 않은 권위, 그들이 보기에 불법적 권위를 가지고 과격한 행동을 일삼은 것은 커다란 죄목으로 엮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이죠. 따라서 그들의 질문은 우리가 주지도 않았는데 너의 권위는 도대체 어떤 권위이며 누가 준 것이냐 이런 의미의 질문인 것이죠.
물론 질문의 의도는 예수님에게서 불법적 요소를 찾아 신성모독죄를 뒤집어씌워 죽일 방도를 모색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질문으로 응수하십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얼마 전 죽은 세례 요한을 소환합니다. 요한이 베푼 세례의 출처가 하늘인가 사람인가? 사실상 대제사장의 질문에서 권위 대신 요한의 세례로만 바꾸어 되물으신 것이죠. 세례요한이 선지자로서 갖는 권위는 백성들에게 충분히 인정되었습니다. 하지만 헤롯 안티파스와 종교지도자들은 인정하지 않았죠. 그저 권력에 재를 뿌리는 훼방꾼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를 참수했던 것이죠.
그때 종교지도자들은 침묵으로 헤롯 안티파스에게 동조했었죠. 즉 이들은 요한의 권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이 이들을 진퇴양난에 빠뜨렸습니다. 요한의 권위가 하늘로부터라고 인정한다면 하나님의 선지자를 믿지 않고 죽인 것이 되고, 사람으로부터라고 답한다면 세례요한을 여전히 참 선지자로 인정하는 백성들의 반박과 저항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종교지도자들이 실상 두려워하는 대상은 하나님 아니라 민심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을 두고도 망설이고 있는 것이죠. 그러다가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비겁하고 궁색한 변명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대답을 회피했으니 자신도 답을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죠.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답 대신 놀라운 비유를 말씀하시죠. 그 비유가 12장 1절부터의 말씀이죠. 이 비유는 방금 살펴보았던,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의 권위에 관해 논쟁했던 사건이 비유의 배경이 됩니다. 이 비유의 핵심 주제는 권위에 관한 것이죠. 비유는 이렇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듭니다. 울타리를 두르고 포도즙 짜는 틀을 마련하고 망대까지 지었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에 온갖 정성을 쏟았습니다. 주인의 정성은 극상품 포도를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주인은 타국으로 가야했고, 떠나면서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임대로 주었습니다. 2절 처음에 때가 이르매, 주인은 농부들에게서 포도원의 소출을 받기 위해서 한 종을 보냅니다. 주인으로서 마땅한 것을 요구했습니다. 주인의 마땅한 권리이죠. 주인이 보낸 종은 주인을 대신해서 주인의 권위를 가지고 농부들에게 정당한 열매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농부들의 태도가 놀랍습니다. 주인이 보낸 종을 붙잡고 폭력을 사용하고 보란 듯이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것은 종뿐만 아니라 사실상 주인에 대한 모독이며 불법인 것이죠. 주인이 다른 종을 보냅니다. 하지만 악한 농부들은 이전의 종에게 한 것처럼 행합니다. 세 번째도 마찬가지입니다. 농부들의 폭력은 점점 심해지고, 잔인해집니다. 이번에는 그 종을 죽이죠. 다시 종들을 보냅니다. 이번에는 많은 종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악한 농부들이 다수는 때리고 다수는 죽입니다. 악한 농부들은 주인의 권리와 권위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불법을 행하며, 종들을 죽여서 주인에게 피해를 주고 수치를 줍니다.
주인이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보냅니다. 아들만큼은 존대하겠지 믿고 보냅니다. 왜냐하면 아들은 신분과 지위가 종들과는 차원이 다르고, 주인이나 다름없음을 뜻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악한 농부들은 주인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반응을 하죠. 아들을 보고 상속자이니 아들을 죽여서 모든 유산을 차지하자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아들을 죽여 포도원 밖으로 내던져버리죠. 이 악한 농부들은 이제 포도원이 자신들의 것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마무리하시면서 질문을 던지시죠.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이렇게 질문하시면서 예수님이 직접 답을 주십니다.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다른 비유들과는 다르게 예수님께서 직접 해석을 해주시지는 않습니다. 대신 시편 118편 22절 말씀을 인용하시죠.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그러면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묻습니다. 이 말씀을 읽어보지 못했느냐.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 때, 무리가 외친 찬송, 시편 118편 25절 26절 말씀 바로 앞, 22절, 23절 말씀입니다. 놀랍게도 종교지도자들은 이 비유가 자신들을 겨낭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이 비유에 대해 해석 없이 비유를 깨달은 것입니다. 이 비유가 너무도 확실했기 때문에 해석이 필요없었던 것입니다.
보냄을 받은 종을 죽인 자들이 바로 종교지도자들이었고, 그 중 선지자인 세례요한 역시 결국은 종교지도자들이 죽였고, 마지막 아들 예수님이 보내심을 받은 것이죠. 이 종교지도자들이 포도원을 파괴하고 삼킨 자들이고, 머리를 맞대고 계획하는 것이 아들을 죽여서 이스라엘에서 영구 집권, 권력을 이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권위로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하고 있었고, 포도원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며 아들의 것인데, 주인 행세하고 있었습니다. 악한 농부들에게 심판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되는 것이죠.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얻을 이익을 위해 신앙 양심과 진리를 버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예수님 당시에 있는 일은 아닙니다. 어느 시대이건 있어 왔고, 지금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단지 권력이 아닐 뿐, 다른 모습으로, 우리가 원하는 다른 것이 우리의 신앙 양심을 저버리게 만들거나 유혹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늘 깨어 있어서 그 무엇과도 주님과 바꾸지 않으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