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강도사 / 막 12:35-44

◎본문: 막 12:35-44

◎개요

35-37절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

38-40절 서기관들을 삼가라

41-44절 가난한 과부의 헌금

◎본문연구

오늘 본문은 3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35절부터 37절은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에 관해서, 38절부터 40절까지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경고하시고, 41절부터 44절까지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내용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뜰에서 종교지도자들과 공개변론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변론과 가르침에 많은 사람이 놀라죠. 명절 순례객으로 발 디딜 틈 없었을 성전 경내에서 이처럼 공개적 행보는 많은 사람의 관심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무리를 향해 가르침을 주시는데,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비판을 내용으로 하며 그 수위가 상당히 높아집니다. 특별히 본 단락에서는 서기관들이 주요 타깃으로 등장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신학적 이슈로 평소 메시아에 대한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다루십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 해석해왔죠. 하지만 구약 어디에서도 메시아를 두고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로 언급한 곳은 없습니다.

구약의 가장 오래된 다윗적 메시야 예언은 초기 다윗 언약 속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 언약은 북이스라엘 멸망 때 ‘이새의 줄기, 한 싹, 한 가지’등으로, 남유다의 멸망 때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일어날 것이라는 소망으로 구체화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보다 한 세기 전에 ‘다잇의 자손’이라는 정확한 표현이 등장을 합니다. 다윗의 자손이 와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다. 무엇보다 이방인들을 무찌르고 더러워진 예루살렘을 정결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당시 바리새인들의 메시아 신학으로 자리 잡았으며 서기관들은 예수님 시대까지 이것을 가르쳐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 경내에 모인 무리에게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서기관들이 늘 가르쳐왔던 바리새 신학적 메시아 사상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익숙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리에게 그것을 물으십니다. 어떻게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말하느냐? 곧바로 시편 110편 1절 말씀을 인용하는데, 예수님은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한 고백이라고 말씀하시죠.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성령에 감동된 다읫의 말을 대조하고 있는 것이죠. 다윗이 말하는 내 주는 오실 그리스도, 메시야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이 그 메시아에게 주라고 칭했으니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라는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혈통적으로 다윗의 자손 됨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만 현실의 이스라엘 회복에 초점이 맞춰진 바리새인들의 정치적 메시아관을 뛰어넘어, 다윗도 이루지 못한 더 큰 하나님 나라를 이룰 새로운 메시아 상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당시 서기관들의 가르침에 도전하자, 사람들은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다른 예수님의 가르침에 환호합니다.

38절부터 40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율법교사라는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대접은 받으면서 삶은 율법의 정신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예수님이 꼬집는 거짓되고 외식된 신앙 행위들이 구체적으로 소개됩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과 갈등의 수위를 한층 더 높여가게 되죠.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기를 즐겼습니다. 시장에서는 사람들로부터 존경의 인사를 받았습니다. 마태는 좀 더 자세하게, 성경구절을 담은 상자로 손이나 미간에 부착하는 띠, 경문 띠라고 하는데, 이 경문 띠와 함께 긴 옷을 언급합니다. 인위적으로 경건을 자아내는 방식이죠. 자신의 신앙심을 사람들에게 돋보여 대접받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전부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위였습니다. 시장에서는 랍비라 칭함 받으며 문안받는 게 하루 일과였습니다. 마을에서는 랍비를 영적 아버지로 섬겼습니다. 회당에서는 언제나 상석을 고집했고, 잔치 자리에서 역시 윗자리에 앉기를 당연시했습니다. 앞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나라와는 정반대의 모습인 것이죠. 예수님은 이렇게 스스로 만든 경건을 뽐내며, 사람들로부터 섬김받기를 즐겨했던 서기관들을 주의하라고 강력하게 경고하시는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히 대접받는 것만을 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욱 심각한 외식의 모습이 이어집니다. 겉으로는 화려한 경건을 자랑했지만, 속은 탐욕과 방탕과 불법으로 가득했습니다.

대표적으로 과부의 가산을 집어삼킨다고 말씀하시죠. 가장 연약한 보호 대상의 마지막 재산까지 전부 빼앗는 악행을 일삼은 것입니다. 길게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및 경건생활을 대변하는 행위입니다. 연약한 과부의 재산을 교묘히 빼앗으면서 경건생활을 과시하는 겉과 속이 다른 신앙의 표본이 서기관들인 것이죠.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심판이 엄중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왜곡된 가르침과 외식하는 그들의 신앙을 질타하신 후 헌금함을 마주하고 앉으십니다. 미쉬나에서는 성전 주변에 13개의 헌금함이 놓여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중에는 특정 헌금의 제목이 명시되어 있기도 했다고 합니다. 동전이 헌금함에 떨어질 때 그 소리의 크기는 돈의 액수를 짐작케 했죠. 부자들은 옷매무새가 달랐기 때문에 그들이 헌금함에 동전을 떨어뜨릴 때 단박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겠죠. 예수님이 부자는 많이 넣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외모와 함께 요란하게 떨어지는 동전 소리 때문일 것입니다. 그때 한 가난한 과부가 등장을 합니다. 그녀가 넣은 동전은 고작 두 렙돈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 가난한 과부가 앞선 부자들을 포함한 모든 자들보다 헌금을 많이 넣었다고 충격적인 말씀을 하시죠. 분명 일반적 논리에서 통용되는 돈의 많고 적음의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이 풍족한 중에 작은 일부를 넣은 것과 다른 것이죠. 여기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전부를 드린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시는 본문이 중점인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물론 과부의 헌금은 칭찬받아 마땅하죠. 하지만, 이 본문의 요점은 아니라는 것이죠. 서기관들의 겉과 속이 다른 신앙을 질타하는 문맥에서 그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켰다는 구체적 진술에 이어서 등장하는 사건입니다. 즉 이 과부가 극도로 가난한 상태에 빠진 주된 원인은 탐욕스러운 종교지도자들의 교묘한 가르침과 강요 그리고 속임수에 가산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망가진 유대사회에 원인이 있었던 것이죠.

따라서 본문에 등장한 가난한 과부는 어떤 모범적인 헌금인의 사례가 아니라 종교지도자들이 가한 종교적 폭력의 희생양의 사례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죠. 과부의 두 렙돈이 마지막 끼니를 위한 전부였다는 것은 부자와 대조해 극단의 가난한 상태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지금 과부로 하여금 가산을 탕진하게 하고 수중의 전부인 마지막 두 렙돈까지 헌금함에 넣게 만든 유대교의 탐욕을 꼬집으시며, 고결하고 거룩해야 할 율법 정신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망가진 유대사회를 고발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는 겉과 속이 다른 모습들이 없지는 않은지, 그리고 그러한 모습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은 모습이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들을 버리시고, 주님 앞에서 진실되고 정직한 모습으로,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댓글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