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신 18:18-19
◎ 제목: 모세와 같은 예언자
고대 국가는 모두 ‘왕국’입니다. 왕이 있고 그 밑에 신하들이 있습니다. 그 나라가 망하지 않으려면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가 ‘왕과 신하, 그리고 정부와 백성 간의 소통’, 즉 ‘언로’가 막히지 않는 것입니다. 왕의 뜻이 신하들에게 잘 전달이 되고, 그렇게 전달된 의중이 국정에 잘 반영이 될 때에 백성들은 평안합니다. 반대로 신하들이 백성들의 삶을 잘 살피고 그게 맞는 정책을 잘 제안할 때에 왕이 그것을 잘 받아들여야 선정을 베풀게 되는 겁니다. 언로가 통하면 국가 질서가 잡히는 것이고 언로가 막히면 어지러워 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 나라의 운명이 ‘언로’에 달려 있다는 말은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왕국’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뜻’이 백성들에게 잘 전달되고, 그 말씀에 온전하게 순종할 때에 하나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충만히 임하고 성도의 삶은 하나님 안에서 평강에 평강으로 임할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언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보좌에 담대히 나아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 시대에는 그 ‘언로’를 대신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선지자’들이지요.
특별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신명기 18장’의 말씀은 바로 그 ‘언로’, 말의 길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언로’를 열어두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 역할을 선지자가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있고, 그릇 되게 자신의 말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으로 포장하는 거짓 선지자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나안에서는 차단해야 하는 언로도 있고, 열어 두어야 할 언로도 있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고,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하나님의 것 인냥 자신의 것을 포장하는 헛된 가르침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언로를 열어놓아 두어야 하는 것일까요?
구약의 선지자는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요 대언자입니다. ‘선지자’라는 직분의 기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선지자는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대변해야 합니다. 그러면 반대로 선지자는 결코 사람들의 욕구에 부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마음을 좇아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께로 받은 말씀만 전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선지자는 ‘선동가’되고 하나님의 말씀은 오용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우시는 의도는 분명합니다. ‘네 형제 중’에서 사람을 세워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기 위함입니다. 그 첫 번째는 다름 아닌 모세입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에 백성들은 모세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직접 말씀하게 하지 마시고 당신이 직접 듣고 우리에게 전달해 달라.’는 요구에서 비로소 ‘선지자’라는 직분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헤 ‘형제 중에서 모세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앞으로 ‘형제 가운데 세워진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과 자신들 사이의 언로를 분명히 세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워진 선지자들의 말을 듣고는 그 말을 거부할 수도 있고, 또 그 선지자가 왜곡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떤 쪽이 되었던 무한한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19절에 그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이지요. 또한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22절에 자칭 선지자라 하는 자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을 하지만, 그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그 선지자가 자기 마음대로 한 말이기 때문에 그 책임은 그 선지자에게 돌아간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징계’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직접적인 징계’라는 사실입니다. 핵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일은 결고 가볍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선지자로 세워진다는 사실을 회중은 무겁게 받아야 하며,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성실하게 반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선지자 또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라면 그 말씀의 무게를 깨닫고 결코 자신의 사견이나 유익을 첨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마음에 새겨야 한다는 말이지요.
이 시대에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합니까? 개인적인 차원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말씀을 묵상할 때에 그 말씀 앞에 우리 각자는 모두 ‘선지자인 동시에 말씀을 받는 회중’입니다. 그러하기에 그 말씀 앞에 우리 모두는 개인적으로 정직해야 합니다. 이 말씀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비켜나면 안 됩니다. 그 말씀과 정직하게 부딪쳐서 내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말씀으로 변화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상황처럼 공동체가 목사를 통해 말씀을 받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적용이 될까요? 예배 가운데 말씀을 선포하는 저와 같은 목사는 그 순간은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러하기에 목사는 설교 가운데 자신의 사견을 첨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가감 없이 선포해야 합니다. 반면에 공동체는 그 목사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사를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로 인정하고 그 선포되는 말씀에 순종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귀 기울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복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18절에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 자 하나를 일으키신다고 한 이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 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성육신’ 하신 것을 요한 사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나타나심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공생애 전체를 다름 아닌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분의 가르침, 치유와 회복의 역사, 십자가 고난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그 분의 생애 자체가 우리에게 던진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구원의 메시지’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음에 영접하고,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그 생명의 능력을 따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