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신 20:1-20
◎ 제목: 이스라엘의 전쟁
1. 본문 개요
a. 신 20:1-9 전쟁 준비
b. 신 20:10-20 적에 대한 처리 규정
2. 관찰
a. 1-4절: 제사장 선언
b. 5-9절: 군사 모집에서 제외되는 자들
c. 10-15절: 정복한 성읍에 대한 규정
d. 16-20절: 가나안 땅 처리 규정
3. 적용
신명기의 말씀은 이제 곧 가나안 땅으로 입성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압 평지’에 모아 놓고 모세가 다시 한 번 계명을 새롭게 하는 설교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나안을 정복해 나가는 가운데 필요한 지침도 주어지지만, 그 땅을 다 정복 한 것을 전제하고, 그 이후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지켜져야 하는 율법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오늘 신명기 20장에 나타나는 ‘전쟁과 관련된 규례’는 가나안을 정복하는 전쟁과도 일부 관련되어 있지만, 오히려 ‘가나안을 다 정복하고 그 곳에 터를 잡은 이후’에 가나안을 향하여 쳐들어오는 적들과의 전쟁에 대한, 또 적대국을 점령해야 하는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경우에 대한 지침입니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1-9절은 전쟁을 치르는 군대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10-20절은 전쟁을 하는 방식과 전쟁에서 승리할 때에 적국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1절은 적군과 싸울 때에 상대방의 ‘말과 병거, 백성, 즉 군대의 숫자’가 많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숫자의 많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크고 강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적국의 크고 강함으로 인해 두려워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할 때에 그 주변의 상황은 어떨까요? 결코 이스라엘 보다 작은 나라도 없고 약한 나라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나라들과 맞서는 일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자기 백성에게 가장 취약한 조건을 주신 것은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약할 때가 하나님의 강함이 됨을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스스로 강해지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 각자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삶을 기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역사하시는 것을 기대하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 가운데 모든 전쟁을 자신의 전쟁으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친히 싸우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주님만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것이 ‘사람 대 사람’으로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아무리 ‘숫자’가 전부가 아니라고 하지만 분명 상대방이 ‘많은 군대’를 가지고 나온다면 우리도 응당 많은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군대의 숫자를 늘일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명령을 내리고 계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먼저 5절에 새 집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못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쟁에서 전사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낙성식을 하면 안 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6절에는 포도원을 만들고 과실을 먹지 못한 자도 집으로 돌아가랍니다. 전사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 그 과실을 먹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7절에는 약혼하고 결혼하지 못한 사람도 돌아가라고 합니다. 타인이 그 약혼녀를 데려가 혼인하지 못하게 말이지요. 8절은 더 기가 막힙니다. 만약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랍니다. 그 사람으로 인해 두려워하는 마음이 전염되어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릴 것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군대 지휘관들에게 이런 사람들을 다 걸러내고 무리를 거느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전쟁에 나갈 사람들을 쳐내시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군대는 ‘사람의 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군대’는 사람의 머릿 수가 중요합니다. 군사력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군대’는 그런 것에 연연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싸우시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필요한 ‘하나님의 군대’는 많은 사람도, 건장한 사람도 아닌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 전쟁이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다 하실 것임을 믿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군대’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이 ‘하나님의 군대’에 속한다는 것은 너무나 행복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 함께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눈으로 목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 주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통해 행하시는 일을 바라보면서 결코 ‘숫자’를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숫자, 돈의 많고 적음이 교회를 통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결정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신뢰하고 그 분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참여하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이 새벽에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직 하나님의 힘과 능력만 의지하기로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귀한 사역을 감당케 하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10절 이하에서는 하나님의 전쟁을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전쟁에 앞서 ‘화평’을 선언해야 합니다. 적국이 만약 이 ‘화평’을 받아들인다면, 그들과 조약을 맺어 조공을 받고 이스라엘을 섬기게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먼저 ‘화평’을 제시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 싸워야 하는 ‘전쟁의 법칙’은 오직 ‘멀리 떨어진 성읍’들, 즉 ‘가나안에 거하고 있는 족속들’이 아닌 민족의 성읍과의 전쟁에만 해당됩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의 이른바 여섯 족속인 ‘헷, 아모리, 가나안, 브리스, 히위, 여부스’ 족속은 ‘화평’을 먼저 선포하라는 명령도 없고 오직 ‘진멸’하라는 명령만 하시고, 그대로 행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에 위협을 가하는 가나안의 족속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것도 남겨두지 않는 ‘진멸 전쟁’을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호흡하는 어떤 것’도 남겨두지 않는 전쟁입니다. 윤리적인 측면에서 매우 잔인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18절에 이렇게 가나안의 족속을 진멸하는 이유에 대해 그들이 자신들의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들이 너희에게 영향을 줄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악한 영향력은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의도인 겁니다.
이러한 전쟁의 원리는 지금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영적 전쟁’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에 믿지 않는 자라 할지라도 그들과 반목하며 싸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세상의 법’ 위에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지켜야 할 법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을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에게 ‘기독교 신앙’을 훼손하는 그 어떤 일을 강요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는 결코 물러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거절함으로 인하여 세상 가운데 손해를 보거나 혹은 세간의 많은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당할지언정 그것과는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것이 바로 ‘영적 전쟁’의 원리인 셈입니다. 나의 ‘성도로서의 거룩한 삶’을 훼손시킬 수 있는 가치관이나 방법론은 그것이 나에게 많은 부를 가져다 줄 수 있고, 더 높은 지위를 줄 수 있다 할지라도 완전히 ‘진멸’해야 하며 나 개인의 삶과 내가 속한 거룩한 공동체 가운데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끊어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 새벽에 나의 삶은 ‘하나님을 위한 전쟁’으로 살아드리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정욕을 제어함으로 말미암아 오직 하나님의 귀한 것만을 소유하는 영적 전쟁을 싸워 나가기로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