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강도사 / 신 32:15-33

◎본문: 신 32:15-33

◎개요

15-18절 이스라엘의 배반

19-25절 여호와의 분노

26-33절 여호와의 은혜와 보응

◎본문연구

오늘 본문 말씀은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은 15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으로 이스라엘의 배반에 대한 말씀이고, 19절부터 25절까지는 여호와의 분노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26절부터 33절까지의 말씀은 여호와의 은혜와 보응에 관한 말씀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앞서 본문 위의 4절 이하에 보면, 여호와는 반석, 완전, 정의, 진실, 공의 이러한 단어로 묘사되는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15절 말씀은 이스라엘에 대해 반석을 업신여겼다고 말씀하며,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상반된 특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행태는 결국 여호와의 진노를 불러왔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 진노가 다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진노는 안팎에서 있어서 누구도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동시 다발적으로 발행한다는 것이죠.

본문 15절 말씀은 배반하는 이스라엘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우리 개역개정에는 여수룬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칠십인역은 야곱이라고 번역을 함으로써 비판의 대상을 보다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를 닮아야 할 이스라엘이 닮지 않은 것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스라엘은 반석을 업신여겼다고 말씀합니다. 같은 장에 4절 말씀에서 반석을 여호와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반석을 업신여겼다는 것은 여호와를 업신여겼음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업신여기다라는 단어는 같은 장 6절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리석고 지혜없다고 말씀하는 문장에서 어리석다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업신여겼다는 뜻은 하나님을 어리석게 여겼다는 뜻이 되겠죠.

이것은 이스라엘은 다른 신을 섬김으로 질투를 일으키고 가증한 것을 따르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한 것을 뜻합니다. 다른 신을 어떻게 섬겼느냐? 17절에 하나님께 제사하지 않고 귀신들에게 제사함으로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켰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계속해서 이 귀신들에 대해서 그들이 알지 못하던 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17절에서 알지 못하던을 두 차례나 언급하고 있는데, 그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에서 알지 못하던, 그리고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던 것들에서 두려워하지 아니하던이 알지 못하던이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래서 알지 못하던이라고 두 차례 언급을 하는데, 한 번은 이스라엘과 그리고 다른 한 번은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연결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자신과 전혀 무관한, 알지 못하던 신을 숭배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러한 우상을 섬기며 반석이신 여호와를 잊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18절 말씀에서 여호와를 이스라엘을 낳은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대에서 왕은 신의 아들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는 독특하게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낳았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덧붙여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 이 문장에서 너를 내신 이라는 표현은 출산의 고통, 산고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죠.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통 중 하나가 해산의 고통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낳고, 그 해산의 고통을 겪으셨다고 묘사하고 있는 것이죠. 즉, 이스라엘을 위해서 고통이라는 고통은 하나님께서 다 겪고 애를 쓰고 사랑했는데, 이스라엘은 그러한 하나님을 잊었다는 것이죠. 이스라엘의 배반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19절 이하는 이스라엘의 배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보시고 라는 단어는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행위를 지켜보시는 분이심을 상기시켜 줍니다. 같은 장 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눈동자 같이 지키셨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행위를 보시니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을 격노하게 하는 행위였다는 것이죠. 그래서 20절에 내가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겼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숨겨라는 단어는 앞서 보시고 라는 단어와 상반된 단어입니다. 또 여기에서 여호와께서 자신의 얼굴을 숨기시는 이유는 격노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16절 말씀에서 진노하다 라는 단어와 동일한 어근이라는 점에서 본문은 인과응보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여기에는 다시 그 자녀라고 말함으로써,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낳았다는 것을 다시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자녀지만, 자신을 낳아준 여호와와 달리 이스라엘은 진실하지 못합니다. 20절에서 그들을 패역한 세대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죠. 패역이라는 단어의 동일한 어근이 무너뜨리다, 망령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이것은 패역을 넘어 그 결과를 보여주는 용어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에 대해 얼굴을 숨기셨지만, 여전히 이스라엘을 지켜보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돌봄의 의미로 지켜보심이 아니라, 그들의 종말을 지켜보심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20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닥칠 심판, 즉 여호와의 분노를 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분노와 불사르다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여 여호와의 진노가 끊이지 않을 것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진노는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스올에까지, 그리고 사람이 거주하는 곳만이 아니라, 산들에까지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위에 재앙을 쌓을 뿐만 아니라 모든 무기가 다 소진될 때까지 이스라엘을 공격할 것을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진노의 정도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죠. 여호와는 화살, 즉 전쟁의 재앙으로 이스라엘을 심판할 뿐만 아니라, 질병, 들짐승 그리고 독으로 이스라엘에 고통을 더할 것을 말씀하죠.

이렇게 25절까지 심판의 목소리가 지배적이었다면 26절 이하는 자신의 심판을 돌이키시는 여호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후회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선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원수들이 자신들이 강해서 이스라엘을 이긴 것처럼 착각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부정해서도 안되는 것이죠. 이스라엘 원수들이 스스로를 높이며, 더 나아가 그들조차 여호와를 알지 못합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그 원수를 사용하지만, 그들의 교만도 좌시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죠.

26절 이하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대적에 대해 비판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이 발생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31절에 그들의 반석과 우리의 반석이 나옵니다. 30절에 나오는 그들의 반석이 이스라엘의 반석을 가리킨다면, 31절에 나오는 그들의 반석은 이방인의 반석을 가리킵니다. 이어서 이스라엘의 원수를 포도나무에 비유합니다. 민족을 포도나무에 비유하는 것은 예언서에서도 이따금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포도나무는 소돔에 비유되며, 고모라의 밭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적이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멸망을 맞이할 것을 가리키는 것이죠. 소돔과 고모라가 자신들의 끝을 알지 못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대적 또한 자신들의 끝을 깨닫지 못할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이스라엘의 배반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분노와 징계, 하지만 다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치심으로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푸심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자신의 자녀들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격노하고 분노하여 벌만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이죠. 자녀라면 분명 깨닫고 돌아서게 하십니다. 그 발걸음 돌이키게 만드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있었기 때문에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것임을 기억하고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오늘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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