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강도사 / 시 104:1-18

◎본문: 시 104:1-18

◎개요

1-4절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라

5-9절 땅과 물의 경계를 나누신 하나님

10-18절 숲과 각양 짐승을 창조하신 하나님

◎본문연구

오늘도 이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 주님의 은혜가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1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은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고, 5절부터 9절까지의 말씀은 땅과 물의 경계를 나누신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고, 10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은 숲과 각양 짐승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본문 시편 104편은 여호와의 우주적인 통치를 노래합니다. 그래서 이 시의 핵심 주제는 창조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광활한 창조 세계를 서술적으로 묘사하며 노래하고 있는 것이죠. 하늘과 바다를 시작으로 하나님이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골짜기의 샘이 솟아나게 하셔서 숲의 모든 생명체와 인류가 함께 먹고 마시며 윤택한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의 솜씨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04편의 시작은 103편 1절과 같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인은 창조자 하나님을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라고 호명하면서, 창조자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매우 친밀한 관계로 엮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은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다. 고대 세계에서 옷은 사람의 신분을 표현하는 수단 중 하나였습니다. 따라서 존귀와 권위의 옷을 입었다는 것은 숭고함과 장엄함을 지닌 하나님이 온 세상의 왕이라는 뜻이 되겠죠. 하나님의 비교 불가한 통치자의 위엄과 광채에 대한 찬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고대근동 세계에서 왕의 위엄과 권위에 대한 상징은 통치 행위와 탁월성에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근거가 되죠. 그러면서 시인은 창조자 하나님의 위대한 통치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이제 묘사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2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분사형으로 표현합니다. 그는 옷을 입은 것처럼 빛을 입으신 분이시고, 하늘을 휘장처럼 펼치신 분이다. 이러한 분사형은 개역개정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창조의 목적과 신현을 표현하기 위해서 모두 일곱 번 쓰였습니다. 3절에서는 누각을 얹으시는 분, 구름을 수레 삼으시는 분, 바람 날개 위를 걸으시는 분, 4절에서 바람을 사신으로 삼으시는 분, 불꽃을 자기 사역자로 삼으시는 분, 이렇게 표현되었습니다.

먼저 빛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지만, 빛이 하나님의 일부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시고 하늘과 땅을 생명으로 채우셨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배타적 권위를 표현하는 배경이 됩니다. 동시에 하늘은 하나님 통치의 우주적인 규모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늘과 그 아래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창세기 1장에서 말씀하고 있죠. 시인은 빛과 바람 그리고 구름, 번개를 통제하시고 조절하시는 하나님을 모두 분사형을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물이 창조 세계를 위협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두려워했지만, 시인은 그 통제권이 하나님에게 속한 것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바람과 번개를 하나님 일꾼으로 삼으시는 분이라고 묘사하고 있죠. 이것은 우주적인 모든 활동이 창조자 하나님의 활동에 근거함을 역설한 것이며, 우주 활동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죠.

하나님은 땅을 창조하셨고, 땅의 기초를 세우시되 영원히 흔들리지 않게 하셨다고 5절에 말씀합니다. 땅은 하늘과 마주 보는 지면을 뜻하지만, 땅의 깊은 곳과 지하 세계까지 아우르는 총체성 표현이며 우주적인 차원에서의 지구입니다. 따라서 땅은 모든 생명체를 위한 근거로서의 집인 것이죠. 시인은 마치 태곳적 하나님의 창조 사건을 회고하듯 하나님의 업적을 노래합니다. 먼저, 땅은 옷 입은 것처럼 깊음으로 덮였습니다. 여기에서 깊음은 창세기 1장 2절에 나오는 원시의 바다, 곧 태곳적 물입니다. 흥미롭게 물이 산들 위에 솟았다, 서 있다고 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물을 향해 꾸짖고, 그의 우렛소리에 물은 분주히 움직이죠. 자연의 물질세계를 향한 명령에서 하나님의 위엄찬 존재감이 드러나고, 우주적인 왕으로서 하나님의 이미지가 구축됩니다. 위협적인 하나님의 꾸짖음에 물들이 도망치고, 산들과 골짜기들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장면이 펼쳐지는 것이죠.

하나님은 물의 경계를 나누어 물이 넘치지 못하게 하시고, 다시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사람과 하나님이 소통하듯 우주의 물질까지 하나님 명령에 복종하는 장면이죠. 이것은 혼돈을 제압하시고 질서를 수립하신 하나님의 통치 행위에 대한 찬미인 것입니다. 또, 이 땅을 홍수로 넘치게 되는 것으로부터 구원하는 능력의 보호자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시인은 여기에서 그를 모든 피조물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관대한 은혜를 베푸는 자로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음료수를 위하여 신선한 물을 공급하시죠. 10절에 여호와께서 샘이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는 것이죠. 바다에는 우리가 얻기에 충분한 물이 있으나, 한 방울도 우리를 시원하게 해 주지 못하며 바닷물만 마신다면 우리는 계속 목마르게 되죠. 왜냐하면 바닷물은 모두 소금이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마시기에 적합한 물을 제공해주신 것이죠. 학자들은 샘의 기원에 대해서 논쟁도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샘들의 2차 요인이었던 모든 것을 여기서는 1차 요인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골짜기에서 샘이 솟아나게 하시고 내리는 빗물로 불어나게 하신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죠. 샘들은 인간과 또 인간에게 직접 유용한 피조물에게만이 아니라, 11절에 들의 각 짐승에게도 마실 물을 주고 있죠.

하나님은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또한 살아나갈 방도를 허락하며, 모든 피조물들을 보호하시고 다스리십니다. 들나귀들도 그러하죠. 비록 길들여지지 않고 인간에게 전혀 유용하지 않더라도, 들나귀들도 해갈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싫어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들나귀처럼 태어났으나 더 좋은 것을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맑은 물이 풍부함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물이 없으면 주거할 수 없겠죠. 이러한 것의 결핍은 커다란 불행이 됨으로 물의 풍요는 커다란 자비로 여겨져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것이 더 보편적일수록 더 큰 자비가 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인간과 짐승을 위해 편리한 양식을 제공하십니다. 13절에 그는 누각에서 산에 물을 부어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 누각을 3절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누각의 들보로 되어 있으며, 풍부한 소나기를 내릴 수 있는 구름으로 되어 있습니다. 애굽의 나일강가와 같이 강에 물을 주지 못하는 골짜기는 하늘로부터 내리는 비로 물이 흐르게 되죠. 그것은 가나안에서와 같이 시편 65편 9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강이라고 불리웁니다. 이와 같이 비를 머금고, 또는 거기에서 나오는 산물 즉, 땅은 그의 업적의 열매, 결실로 만족시켜 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익을 위한 하나님의 업적의 열매는 땅에 대한 만족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리하여 땅은 그 창조의 목적에 부응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땅에서 자라나게 하는 식물은 땅이 만족하는 그의 업적의 열매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고, 천지 만물은 하나님의 명령과 질서에 응답하여 이 땅에 만들어진 목적에 부응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질서정연하게 만들어진 천지만물을 이 땅에서 사용하고 누리고 살아가는 것이죠.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지 않은 피조물들도 이렇게 질서정연하게 하나님의 명령에 부응하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유일한 피조물, 창조물인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그 목적에 부응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구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뜻을 알아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에 조금이라도 부응하여 하나님의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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