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강도사 / 행 4:1-12

◎본문: 행 4:1-12

◎개요

1-4절 종교권력의 저항과 부흥

5-12절 심문과 변론

◎본문연구

오늘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 은혜가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부터 4절까지는 종교권력의 저항과 부흥에 관한 말씀이고, 5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은 심문과 변론 내용에 관한 말씀입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를 치유한 사건으로 베드로는 솔로몬의 행각에서 설교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성전 뜰에서 선포된 메시지는 강력했습니다. 누가는 먼저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 청중의 반응을 소개하기 이전에 종교지도자들의 반응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을 죽인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 그들의 범상치 않았던 행보에 몹시 심기가 불편했습니다. 더욱이 과감하게도 종교권력의 심장부인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 죽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거침없이 전하고, 이스라엘을 메시아를 죽인 자들로 매도하고 있었으니 종교지도자들이 제자들을 내버려둘 수 없겠다고 판단하게 되죠.

제자들과 사두개인들이 성전 경비 총 책임자를 대동하고 설교가 한창이던 베드로와 요한에게 나타납니다. 특별히 사두개인들이 등장한 까닭은 제자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성전에서 사람들을 자극하며 예수님 안에 부활이 있다고 가르치며 전하고 있다는 것에 분노하고 참지 못하게 된 것이죠. 오후 3시 기도시간 이후, 베드로의 설교가 한창 진행될 무렵에 종교지도자들이 들이닥쳤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잡았는데, 어느새 날이 저물었습니다. 심문 절차 등을 통해 베드로와 요한의 석방 여부를 결정해야 했지만 날이 저문 탓에 구류된 채로 하룻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종교적 절대 권력이 두 사도의 입을 막고 몸을 가두었지만 이미 선포된 복음의 역사는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성전 미문에 앉았던 앉은뱅이에게 일어난 기적과 솔로몬 행각에서 선포된 복음 메시지로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의 첫 설교 때 삼천 명이 마음에 찔려서 회개하였듯이 이번에는 남자만 약 오천명의 유대인들이 복음을 믿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날이 밝자 더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앞서 제자들이 선포한 복음을 듣기 위해 점점 많은 유대인들이 모였던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대제사장들과 그들의 문중이 다 참석합니다. 누가는 특별히 네 사람의 대제사장 명단을 나열합니다. 안나스와 가야바, 요한 그리고 알렉산더입니다. 안나스와 가야바는 사복음서에도 언급을 하고 있어서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죠. 안나스는 가야바의 장인이기도 하죠. 요한과 알렉산더에 대해서 알려진 정보는 없지만 대제사장 문중 내 유력한 권력가로 보는 것이 일반입니다. 실제 요한은 가야바의 후임이 되죠. 이들은 예수님을 죽임으로서 꺼졌다고 생각한 예수운동이 다시금 불씨가 일어나 번져가는 것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기에 모인 것이 분명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거대 종교권력에 에워싸인 채 한가운데 서게 됩니다. 그들이 던진 질문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같은 일을 행하느냐라는 것이었죠. 이들은 예수님에게도 이렇게 물었었죠. 다시 말해, 모든 종교적 권세는 성전과 성전유대교 최고 의결권자로부터 나오는데, 자신들이 부여하지 않은 권위와 능력으로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치유하고 성전 안에서 민심을 규합하고 있으니, 대체 그렇게 할 권세를 준 자의 이름이 무엇이냐라는 것이죠. 베드로가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할 때, 여기에 대해서 이미 말했었죠. 사도행전 3장 12절부터의 말씀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생명의 주, 예수님의 권위이고 그 이름의 권세이다라고 설교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심문에 베드로가 변론을 시작합니다. 비록 재판 과정이지만 베드로의 세 번째 설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본문 8절에 누가는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의 앞선 두 번의 설교 역시 성령충만함 가운데 진행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특별히 누가가 성령충만을 언급한 까닭은 이어질 베드로의 변론이 하나님의 권능을 덧입은 결과인 것과 그 과정에서 나타난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두 번의 설교에서 그랬듯이 베드로의 설교, 선포는 청중을 부르면서 시작합니다.

첫 번째 설교에서는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렇게 불렀고, 두 번째 설교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렇게 불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심문 과정에서 변론이라는 양식을 취하기 때문에 베드로는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다름 아닌 고발인들이죠. 고발인들인 이들을 불러서 주의를 집중시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우선 앉은뱅이의 치유 사건의 경위를 다시 한번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이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착한 일로 번역된 단어는 선행이라는 뜻입니다. 선을 베푸는 자보다 받는 당사자에게 유익한 일입니다. 분명 그 앉은뱅이가 평생의 저주스러운 자리를 털고 일어난 사건은 그 앉은뱅이에게 좋은 일이었습니다.

육체적 삶의 고통에서 해방뿐 아니라 무엇보다 그가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구원을 얻은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종교지도자들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라고 묻는 것이죠. 베드로가 변론합니다. 우선 베드로는 모든 이스라엘과 종교지도자들의 무지를 지적하며 알라고 명령합니다. 베드로가 두 번째 설교에서도 이들의 무지를 지적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무슨 짓을 했는지 또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어떠한 일을 하셨는지 알라는 것이죠. 예수님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다. 그리고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였던 그 사람이 건강하게 된 것인 바로 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 때문이다.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 사람이 바로 이 일의 증인이다 라는 것이죠.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하고 범죄자 취급한 그들이 사실상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들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지금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하지만 사실상 베드로가 그들을 심문하고 있는 것이죠. 베드로는 이스라엘과 종교지도자들이 죽인 예수님이 누구신지 시편 118편 22절 말씀을 인용해서 선언합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종교지도자들 너희들이 버린 돌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러나 그 돌이 집을 세우는 기초석 곧 반드시 필요하고 가장 중요한 머릿돌이 되었다. 그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집도 성전도 하나님 나라도 세울 수 없음을 말하면서 베드로는 이 사실을 구원으로 확장합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데, 너희들이 버렸던 돌, 너희들이 버렸던 예수님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이름은 예수입니다.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 이름에 권세가 있고 권능이 있습니다. 그 이름을 붙들고 그 이름의 증인으로서 살아갈 때,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주님의 권세와 권능을 드러내심을 믿고, 오늘 하루도 증인으로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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