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행 4:13-31
◎ 제목: 위기의 순간에 드리는 성도의 기도
1. 본문 개요
a. 행 4:13-22 종교지도자들(공회)의 위협과 석방
b. 행 4:23-31 석방에 대한 공동체의 반응
2. 관찰
a. 13-15절: 두 제자의 담대한 증언
b. 16-18절: 예수의 이름으로 증언하는 것을 금지함
c. 19-22절: 두 제자의 거부와 석방
d. 23-26절: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송
e. 27-28절: 구약의 성취로서의 고난을 이해
f. 29-31절: 기도와 성령충만
3. 적용
오늘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13-22절은 종교지도자들이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를 위협하고 석방하는 내용이고, 이어지는 23-31절은 석방된 두 사도들를 보는 공동체의 반응을 내용으로 담고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17-18절은 종교지도자들이 두 사도들을 향하여 앞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도무지 말하지도, 가르치지 말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협박’을 하는 겁니다. 그러한 종교지도자들의 경고에 대해 요한과 베드로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19절에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지 판단하라고 도리어 으름장을 놓습니다.
관리들은 이러한 두 사도의 태도가 달갑지 않았지만, 21절에 백성들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서 위협만 하고 놓아 주었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두 사도’였다면 풀려난 다음 어떤 행동을 보이는 것이 이성적입니까? 일단 잠시 성도들과 함께 하는 일에 거리를 두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방금 풀려났으니까 몸을 좀 사리고 말이지요. 하지만 두 사도는 풀려나자마자 성도들을 만납니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지요. 만약 우리라면 성도들과 함께 ‘그들이 우리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전하지 말라고 협박했다. 앞으로 그랬다가는 뼈도 못 추린다더라.’ 그런 이야기 굳이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괜히 성도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들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지 얼마 되지 도 않았는데 말이지요. 그런데 사도들은 23절에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렸다.’고 기록합니다. 자세하게 빠짐없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두 사도의 말에 대해 성도들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전혀 의기소침해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더 담대하게 달려 갈 것을 결단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담아 전달했을 때에 절망스러운 소식도 소망이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전파되는 것을 금하려 들었습니다. 단순한 경고가 아닙니다. 죽음을 담보로 한 경고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믿음의 눈으로 선포하고 이야기하는 사도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바로 그 사도들의 모습 속에서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참 믿음의 성도가 가져야 할 태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절망 속에서도 ‘절망을 절망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소망으로 말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의 태도임을 믿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도들의 말을 다 들었습니다. 사도들이 모든 상황을 소망스럽게 잘 전달하였습니다. 하지만 위기는 위기입니다. 절망의 순간이 닥쳐 온 듯합니다. 그때에 지금 예루살렘 성도들이 선택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에 우리는 여러 가지 행동을 취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자원이 무엇인지 살필 수 있습니다. 나에게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 내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찾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 일도 해야 합니다. 방법을 구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그 모든 일에 최우선으로 ‘기도’하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지금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선택한 방법을 보십시오. 그들은 다름 아닌 ‘기도’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에게 더 이상 이 문제를 해결할 자원이 없기 때문입니까? 내가 더 이상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기도만이 절망을 뚫을 수 있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도로 오순절 성령이 임했습니다. 기도로 방언의 역사들이 터집니다.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를 보았습니다. 이미 그들이 본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본 그대로 행동합니다. 그리고 역시나 지금 이 위기의 순간에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이 교회의 고난 가운데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첫 번째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기도’입니다. 24절에 성도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이시요.’라고 하나님을 부릅니다. 이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 맞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살고 죽는 모든 일도,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온전하게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이 시간 나의 기도는 어떠한지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나의 삶의 주권은 누구에게 드려져 있습니까? 나는 나의 삶의 주권을 나의 손에 올려놓고 아등바등 하는 사람은 아닙니까? 위기의 순간이라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삶의 주권자 되심을 인정하는 기도를 놓치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 기도 내용은 25-28절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핍박을 말씀으로 해석하는 기도’입니다. 25-28절은 구약 시편 2편의 말씀입니다. 성도들은 지금 자신들에게 닥친 핍박이 이미 구약의 말씀에서 예고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는 셈입니다. 자신의 핍박이 어떻게 말씀으로 해석되는지를 스스로 고백하며 기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28절에 그 모든 핍박은 ‘하나님의 뜻대로 예정하신 것’이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시편 2편에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서 참 왕을 대적하는 것처럼, 유대교의 공회가 자신들을 핍박하려 하고 있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예정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신들의 문제를 철저히 말씀으로 해석하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위기가 닥치면 여러 채널을 동원해서 이 위기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는지를 재보고 따집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위기를 해석하는 방법은 달라야 한다고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지금 예루살렘 성도들은 철저하게 말씀에 근거하여 상황을 올려드립니다. 우리는 위기가 우리에게 닥칠 때 마다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에게 닥친 고난은 성경에 의거된 고난인지, 주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나의 모자람으로 인해 발생한 것인지, 말씀에 비추어 살펴야 합니다. 그렇게 말씀에 비출 수 있는 사람만이 참 신자이고, 성도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어지는 29-30절은 주님의 능력으로 돌파하기를 구하는 성도의 세 번째 기도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위기가 닥치면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해 볼 방법은 없을까하고 궁리를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타난 성도의 기도에는 자신들의 안위를 지켜달라는 기도하지 않고, 도리어 이 시련을 뛰어넘어 하나님께서 맡겨놓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표적과 은사를 주시도록 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기도를 ‘사명 지향적 기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 새벽에 위기 가운데에서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는 무엇인지 돌아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재권을 인정하는 기도, 말씀을 의지하여 현상을 해석하는 기도, 능력 주시어 돌파하기를 구하는 기도! 오늘 이 시간 그 기도를 기억하여, 초대 교회가 고난’ 가운데 경험했던 성령 충만한 삶, 어느 누구도 모자람을 경험하지 않는 충만한 삶을 우리도 살아낼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