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행 4:32-5:11
◎개요
32-37절 두 번째 통용하는 모습
5:1-11 아나니아와 삽비라
◎본문연구
오늘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 은혜가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4장 32절부터 37절까지의 말씀은 두 번째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모습이고, 5장 1절부터 11절까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대한 내용의 말씀입니다.
오순절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 이후 공동체의 물건을 통용하는 모습이 사도행전 2장에서 소개되었습니다. 그 모습은 지속되어 초기 예수 공동체의 존재 방식으로 자리매김합니다. 핵심은 공동체가 한마음 한 뜻을 이루는 것이죠. 그리고 그 안에서 서로의 필요를 서로가 채우며 예수님 안에서 부요한 삶을 맛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유대 예루살렘의 한 지역 교회를 넘어서 모든 이방 교회들을 아우르는 우주적 교회의 원리가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역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물건을 통용하고 각자의 재물을 팔아 함께 나누는 자발적이고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로마 세계에서 신생 공동체의 새로운 존재 방식입니다. 무엇이 이러한 삶을 가능하게 합니까? 이들 안에 임재하신 성령 하나님이시죠. 성령 하나님의 활동은 사도들을 통해 선명하게 확인되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사도들을 통해 권능을 보여주셨습니다. 특히 그들이 전한 부활 메시지로 모두가 큰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 공동체는 기도, 성령, 나눔, 권능, 증언, 은혜 등으로 선명한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부요함을 맛보고 경험하게 됩니다. 대부분 가난한 자들이었을텐데, 자신이 가진 소유를 팔아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줍니다. 심지어 집과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 발 앞에 두었고, 사도들은 필요에 따라 차별 없이 나누어 줍니다. 모두가 사도들의 권위에 복종함으로 공동체에 선한 질서를 만들어갑니다. 이 모든 행위는 공동체의 내적 연합을 목적으로 하며 궁극적으로 외적 증언의 사역을 향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시고 은혜를 베푸심은 공동체가 예수님 안에서 내적으로 강력히 연합하고 외적으로 담대히 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잘 모여야 잘 흩어질 수 있습니다. 누가는 공동체 내 물건을 통용하는 일이 자발적으로 실천한 모범 사례로 바나바를 소개합니다. 바나바는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으로 요셉이라는 유대식 이름을 가지고 있던 구브로 태생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입니다. 사도들은 그를 바나바라고 불렀는데,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누가가 이름의 뜻을 밝힌 것은 향후 그의 사역을 소개하기 위한 포석인 것입니다. 마가의 삼촌이기도 한 바나바는 사도들과 친밀한 관계를 가졌고, 향후 이방인의 사도 바울과 유대 사도들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죠.
바나바 역시 소유하고 있던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 발 앞에 둡니다. 이렇게 발 앞에 둔다는 것은 사도들의 권위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의미하는데, 이 행동을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발적으로 그리고 은혜 충만한 기쁨으로 한 행동이었다는 것이죠.
이렇게 예수님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부요함을 맛보던 예수 공동체가 내부적 위기와 도전을 마주하게 됩니다. 누가는 모범적인 바나바와 대조하여 한 부부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속임과 죽음에 대한 비극적 이야기이죠. 이 이야기는 초기 공동체와 모든 독자들,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적잖은 충격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역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소유를 파는 일에 동참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행동에 부정과 불의가 섞여 있었습니다. 남편인 아나니아가 땅을 팔아 받은 값의 일부를 감춘 것이죠. 아내 삽비라도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비극의 발단이죠. 먼저 아나니아가 일부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습니다. 아마 성령과 은혜가 아닌 재물 욕심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땅을 파는 일에 마지못해 동참했을 수도 있고, 동기는 선했지만 땅을 판 돈을 보고 탐심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 그들의 행위 전체를 악한 것으로 성경은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들은 공동체 앞과 사도들 앞에 사실을 숨기고 거짓을 사실인 양 믿게 하려 했습니다. 나쁜 방법으로 사도들을 속인 기만이며, 사실을 숨기고 사도들로 하여금 거짓을 믿게 하는 기망이었습니다.
성령에 충만했던 베드로가 선지자적 통찰력으로 이 모든 사실을 꿰뚫어 봅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사탄에 너의 마음에 가득하다고 꾸짖습니다. 공동체 내의 성령충만과 사탄충만이 극적으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겨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령을 속인 것이죠. 거짓의 아비 사탄에게 복종해 사람에게 거짓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하나님께 거짓을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거짓과 속임은 사탄에 대한 충성과 복종인 것이죠. 성령 공동체의 하나 됨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인 것이죠. 모두가 은혜 아래 자발적으로 비움과 채움을 맛볼 때, 이 부부는 거짓된 비움과 탐심의 채움을 선택한 것입니다. 재물의 소유권과 행동의 주도권은 모두 아나니아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유권과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드리지 못하고 내어드린 척하며 하나님을 멸시하고 공동체를 오염시켰던 것이죠.
아나니아가 탐심에 사로잡혀서 일부를 착복한 것이 죄의 시작이지만, 아나니아 자신을 파국으로 이끈 것은 거짓과 위선으로 성령을 속인 죄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나니아의 이야기를 신약판 아간 이야기라고도 합니다. 구약에서 아간 이야기가 신약에 아나니아의 이야기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이죠. 가나안 땅, 약속의 땅에서 순종으로 힘차게 전진하려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공동체를 아간의 거짓과 탐심이 멈추어 세웠던 것처럼, 성령 충만한 가운데 복음을 들고 세상을 향해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힘차게 전진하려는 예수 공동체를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멈춰 세우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즉각적으로 충격적으로 나타납니다. 베드로의 책망을 듣자마자 아나니아가 엎드러져 죽고 맙니다. 이 말은 그만큼 아나니아의 죄가 심각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나니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 삽비라도 똑같이 그렇게 죽게 되죠.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우리 역시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죄를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이 죄를 짓자마자 바로 심판하지 않는 것이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이 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죽이지 않고 참으시는 것이 은혜인 것이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은 교회 순결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순결해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첫 공적인 죄이기 때문에 일벌백계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심판자이시기도 합니다. 분명 사랑이 한이 없으시고, 그 사랑 때문에 아들까지 내어주셨지만, 심판하실 때는 그 누구보다 무섭고 냉정하다는 사실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자녀에게는 심판하지 않으시고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는 분, 하지만 자녀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심판주로 오시는 분이심을 기억하고 항상 매일의 매순간이 주님의 은혜임을 잊지 않으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