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강도사 / 행 5:12-26

◎본문: 행 5:12-26

◎개요

12-16절 사도들의 표적

17-26절 종교지도자들의 두 번째 도전

◎본문연구

오늘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 은혜가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두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먼저 12절부터 16절까지의 말씀은 사도들의 표적에 관한 말씀이고, 17절부터 26절까지의 말씀은 종교지도자들의 두 번째 도전으로 볼 수 있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성령충만으로 사도들에게 큰 권능이 임했습니다. 그 권능은 담대한 말씀 선포와 놀라운 기사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긍정적으로는 믿는 자들의 수가 증가하는 결과를 낳지만, 부정적으로는 종교지도자들의 반격을 초래합니다. 예수운동, 복음운동이 들불처럼 퍼져나가듯 유대교의 박해도 비례해 더욱 격해졌죠. 하지만 그만큼 하나님의 개입도 강하게 나타나는 모습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상당한 충격을 초래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을 통한 놀라운 표적과 기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한 계속된 표적과 기사로 공동체는 경외심으로 사도들의 권위에 복종하며 연합했습니다. 그런데 외부의 반응은 엇갈렸습니다. 신비로운 일에 놀라며 복음 안으로 들어오는 자들이 많아지는 긍정적인 반응이 있는가 하면, 두려워 관계를 꺼리는 사람들도 많았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그저 반대자들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이들로부터 계속해서 칭송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사람들 역시도 초기 공동체인 예수 공동체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의 적대적 시선을 의식해 대놓고 상종하지 못하는 이유도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운동은 확산되었고 공동체의 연합은 갈수록 강화되었습니다. 성도들은 앞서 베드로가 두 번째 설교를 했던 장소인 솔로몬 행각에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며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생생하게 역사하고 계심을 확신했습니다. 거기에서는 늘 그랬듯이 가르침과 기도가 중심이었을 것입니다. 믿는 자의 수가 더해졌다는 것은 예루살렘 내 예수운동이 급격히 확산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죠. 이것은 곧 앞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엄포를 놓고, 협박을 했던 종교지도자들의 적대감이 그만큼 고조되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종교지도자들의 대응이 본문 17절부터 5장 끝부분 42절까지 말씀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어서 누가는 사도들이 행한 치유사역과 축귀사역을 요약해서 진술합니다. 사도들의 표적과 기사는 얼마 전 예수님의 사역을 재현했습니다. 그때처럼 사람들은 환호했고, 예루살렘 인근에 거주하는 병든 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이 사도들에게 몰려들었습니다.

병든 사람을 메고 와서 거리에 침상과 요 위에 누이고 치유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누가는 길가에 늘어선 사람들이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의 그림자라도 스치기를 바랐다는 소망적인 이야기를 전합니다. 베드로의 그림자가 덮는 것을 하나님 임재의 덮음으로 생각했을 수 있겠죠. 그들은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역사하심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필요를 채움 받았습니다. 16절 끝부분에 다 나음을 얻으니라라는 진술이 사역의 역동성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 민심은 순식간에 요동쳤습니다.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으로 종교지도자들은 이미 베드로와 요한을 한차례 붙잡아서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도 말고, 심지어 이름조차 언급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음을 확인합니다.

누가는 대제사장들과 사두개파의 심리 상태를 시기심으로 가득찬 것으로 묘사합니다. 마치 사탄이 아나니아의 마음에 가득 찼던 것과 평행하고 있죠. 마침내 이들의 두 번째 공격, 사도들을 향한 두 번째 물리적 공격을 가합니다.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두었음을 단도직입적으로 누가는 기록합니다. 체포 작전이 매우 신속하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하죠. 첫 번째 체포 때는 베드로와 요한만 대상이었다면, 이제 사도 그룹 전체로 확대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의 구금을 공개적으로 전시함으로 무리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사도들을 가둠으로서 예수 공동체 운동에 급제동을 걸게 되죠.

하지만 그날 밤, 갑자기 주의 사자가 밤 중에 옥문을 열어 제치고 사도들을 밖으로 끌어낸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넣었지만, 주의 사자는 끄집어낸 것이죠. 그들의 투옥이 신속했듯이 출옥도 매우 간결하고 급작스럽게 일어납니다. 베드로가 두 번의 설교를 통해 종교지도자들의 죄를 지적했는데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거세게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였으나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것처럼, 사도들을 가두었으나 하나님이 꺼내십니다. 주의 사자가 옥 밖으로 나온 사도들에게 성전에 서서 생명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에서 전하라고 한 생명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을 가리킵니다. 생명은 곧 구원과도 직결됩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 나중에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예수님을 이 구원의 말씀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생명의 말씀은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메시지는 결국 예수님이죠. 날이 새자 사도들이 천사의 명령대로 성전에 들어가서 생명의 말씀을 가르칩니다. 탈옥수임에도 불구하고 도망치거나 숨지 않고 오히려 공개적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모습이죠. 반면 종교지도자들은 급히 공회 및 원로들을 소집합니다. 처음보다 더 큰 규모로 보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여전히 투옥되어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겠죠. 게다가 사도들을 감시하기 위해서 많은 간수들을 세웠으니 더 그러하겠죠.

아무것도 모르고 사람들을 보내어서 사도들을 공회로 끌고 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상황의 보고를 들었습니다. 옥문은 여전히 든든히 잠겨 있고, 외부 침입의 흔적이 전혀 없고, 간수들은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보고를 들은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심히 당황합니다. 사도들이 사라진 일이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 어리둥절할 무렵 한 사람이 급히 와서 보고합니다.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죠. 현장에 도착하자 보고대로 사도들이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고, 사도들을 다시 체포합니다. 하지만 백성의 집단적 돌발행위가 우려되어 물리력으로 강제하지는 못합니다. 누가는 체포하러 온 자들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했다고 밝힙니다.

무리가 분노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사도들을 무력으로 체포하고 그들의 선포를 막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사도들의 전한 내용을 믿고, 예수님을 죽인 책임을 종교지도자들에게 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의 설교처럼 메시아를 죽인 자들로서 신성모독을 저지른 자들이 되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백성들이 돌을 들어 그들을 쳐도 할 말이 없는 것이 됩니다. 즉, 사도들이 민심을 교묘히 활용해서 자신들의 체포를 충분히 모면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죠. 오히려 크게 몸부림으로 저항하지 않고 잡혀주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일하심을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분명 천사를 보내셔서 감옥에서 풀어주시고 생명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붙잡히게 되죠. 본문 다음 구절부터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지만, 그리고 붙잡혀서 공회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심문을 받게 되고, 사도행전 5장 마지막 절, 42절에 사도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도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고 말씀하면서 5장을 맺고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대부분 우리는 100프로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조금은 이해가 갈지 몰라도 대부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은 분명 선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당장 앞에는 어려움과 역경이 있을지라도, 금세 전화위복이 되게도 하시고 또, 크고 아름다운 열매들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낙심치 마시고, 주님의 일하심을 끝까지 믿고 견디시며, 때로는 그저 그분의 일하심을 바라보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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