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행 7:17-36

◎개요

17-22절 애굽에서의 모세: 모세의 출생과 성장

23-29절 광야에서의 모세: 도주와 나그네의 삶

30-36절 시내산에서의 모세: 부르심과 보내심

◎본문연구

오늘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 은혜가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도 스데반의 설교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 17절부터 22절까지는 애굽에서의 모세, 즉 모세의 출생과 성장에 관한 말씀이고, 23절부터 29절까지는 광야에서의 모세, 모세의 도주와 모세의 나그네로서의 삶에 관한 내용이고, 30절부터 36절까지는 시내산에서의 모세, 모세를 부르심과 보내심에 관한 말씀의 내용입니다.

모세의 출생부터 죽음까지 120년의 생애가 40년 단위로 세 부분에 걸쳐 소개됩니다. 본 단락은 처음 두 시기 80년 서사를 다루며 이스라엘을 속량하기 위해 모세를 준비하시고 부르셔서 마침내 모세를 보내시는 장면까지 담고 있습니다. 설교를 관통하는 주제인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은 스데반 시대 예수님과 이스라엘의 기름자입니다. 모세를 거절했던 그때의 이스라엘과 예수님을 거절한 이 당시의 이스라엘이 교차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셉이 애굽의 역사에서 잊혀졌고, 그를 모르는 새 왕이 등극해 애굽을 통치하게 됩니다. 앞서 스데반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의 430년 시절을 괴로움을 표현했습니다. 바로가 교활한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괴롭게 했죠. 스데반은 바로의 히브리 유아 학살 장면을 언급합니다. 이스라엘의 인구 증가를 막기 위해 벌인 끔찍한 학살이죠. 그 격동의 시절에 아므람과 요게벳 사이에서 모세가 태어납니다. 그들은 사내아이면 나일강에 던지라는 바로의 명령을 어기게 되죠. 출애굽기에서 어머니가 그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을 숨겼다고 묘사하지만, 스데반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이렇게 각색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에서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외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두신 계획과 그를 통해 이루실 모든 일의 선함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죠.

부모의 역할은 석 달 동안 목숨 걸고 아이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이 아이의 생명과 삶은 부모의 손을 떠나죠. 요셉이 버려지듯 모세도 죽음의 강에 버려집니다. 그러나 요셉이 미디안 상인의 손에 넘겨지듯, 모세가 바로의 딸의 건져지게 되죠. 바로의 딸이 모세를 데려가 아들로 키우게 되죠. 출애굽기는 공주가 물에서 건져냈다고 하여 모세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으로 소개됩니다. 그 후 40년은 모세가 애굽의 모든 지혜를 배웠다는 한 문장으로 압축됩니다. 스데반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언약 성취를 위해 예비하신 인물이 모세였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죠.

그렇게 모세 인생의 첫 40년이 흘렀습니다. 스데반은 그즈음에 모세의 마음에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모세의 자각은 하나님께서 모세의 마음에 불러일으키신 선한 일의 결과입니다. 모세는 한 히브리인이 애굽인에게 억울하게 압제당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 장면은 당시 애굽으로부터 압제당하는 이스라엘을 투영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그를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고 곧바로 행동으로 옮깁니다. 그러다 애굽 사람을 죽이게 되죠. 하지만 그렇게 해서 애굽 사람에게서 히브리인의 생명을 구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향후 모세 운명의 청사진이 됩니다. 모세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에 이끌려 그 안으로 빨려들어가게 되죠.

그런데 이 대목에서 스데반은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습니다. 그 사건에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내실 것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이 깨닫기 원했는데 그들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출애굽기에서는 이런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스데반은 모세를 선지자로 알아보지 못한 이스라엘의 무지함을 꼬집으면서, 예수님을 못 알아본 지금 이스라엘의 무지함과 연결하려 하는 것이죠. 이것은 설교 마무리의 또 다른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튿날 화해와 중재를 시도합니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모세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며, 자신들은 모세를 관리나 재판장으로 세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자신을 죽이려 하느냐며 전날의 일을 공개해 버리죠.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세우신 자를 스스로 거부하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대변하는 대목이라고도 할 수 있죠. 이처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이스라엘의 완악함은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완악한 자가 모세를 밀쳐내듯, 완악한 말 한마디는 모세를 애굽에서 광야로 밀쳐냅니다. 당시 배경에서 애굽 왕자가 애굽 사람 하나를 죽인 일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지만 히브리인이 애굽인을 죽인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던 것이죠. 애굽에 신분이 밝혀진 모세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출애굽기는 바로 사건의 전모를 듣고 모세를 죽이기 위해 수배했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즉시 미디안 광야로 도주하게 되죠. 모세의 두 번째 40년 나그네 인생이 그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미디안 땅에서 모세는 나그네로 살게 되죠.

스데반은 모세의 두 번째 40년이 찼다는 말로 그의 마지막 세 번째 40년 스토리로 넘어갑니다. 본문 30절에 천사가 시내산 가시나무 떨기 꺼지지 않는 불꽃 가운데서 광야 40년 세월 자신의 모든 것을 비워낸 모세에게 나타납니다. 신비한 광경에 놀란 모세가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스스로를 계시하시죠. 모세는 이 신비한 광경과 경이로운 음성에 두려워서 감히 시선을 하나님께 둘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기는 모세가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고 말합니다. 두려워 떠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네 발의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선 그곳이 거룩한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거룩한 까닭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스데반의 청중에게는 예루살렘이 그렇고 성전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족장들의 하나님 곧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모세에게 미디안 광야 40년이 버려진 시간처럼 여겨졌더라도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일하신 시간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신을 벗는 것은 많은 상징적 의미를 내포합니다. 40년 애굽의 왕자로서 살아왔던 인생길, 그리고 또 40년 양 떼를 치는 목자로서의 인생길, 그동안 있었던 많은 사건들과 갈림길에서 선택했던 많은 선택들, 그리고 그 결과들, 이것이 지금 모세의 정체성을 가지게 했을텐데, 그 마저도 주님 앞에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죠.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물론 인생의 연수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인생의 연수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도 나의 정체성까지도 주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겸손함으로 살아가느냐 아니면 100년, 120년을 살아도 나를 내려놓지 못하고 내 고집과 신념만을 붙잡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살아가느냐 결국 우리의 인생은 이 문제인 것입니다. 얼마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을 기뻐하고 있는지 우리는 늘 생각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성장하시고 성숙하여지는 말씀이 충만한 믿음의 모습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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