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행 7:54-8:8

◎ 본문: 행 7:54-8:8
◎ 제목: 역설의 죽음

1. 본문 개요
    a. 행 7:54-8:1a           스데반의 순교
    b. 행 8:1b-8:8           예루살렘의 박해로 시작된 복음의 전파


2. 관찰
    a. 7:54-56: 설교에 대한 반응과 스데반의 외침
    b. 7:57-8:1a: 스데반의 죽음과 사울의 등장
    c. 8:1b-3: 예루살렘 박해로 인해 유다와 사마리아로 흩어지는 성도들
    d. 8:4-8: 빌립 집사의 사마리아 전도

3. 적용
    복음을 증거 한 스데반이 순교합니다. 교회의 첫 순교자입니다. 이후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였고, 안타깝지만 21세기 최첨단의 시대에도 순교는 진행 중입니다. 가까운 북한과 중국 등 기독교를 허락하지 않는 나라에서는 기독교인으로 발각되면 소리 소문 없이 잡혀가 고문과 중노동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지요. 어떻게 보면 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것은 인생의 종말이고, 더욱이 순교는 비참하게 단명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보실까요? 그리고 저와 여러분은 순교를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청중들은 ‘마음이 찔려’ 어찌할 바 몰라 사도들의 친절한 안내를 받고 결국 회개의 세례와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상반된 반응을 보입니다. 스데반도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었고, 그의 긴 설교는 성령에 충만한 가운데 선포된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마음이 찔렸다.’고 베드로의 설교와 동일한 반응을 보이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령의 회초리를 맞고도 성전에 하나님을 가두고 천사가 전해준 율법을 모독한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도리어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지요.

    그런데 이러한 청중들의 분노에 불을 집히는 스데반의 결정적인 행동이 나옵니다. 55절입니다. 그가 성령에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라고 외칩니다. 거기에 계신 하나님을 목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서 계셨다는 것은 스데반의 변론이 참된 것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이 증인으로서 변호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되면 스데반이 설교에 언급한 것처럼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잡아 살인한 것이 그대로 입증이 되는 셈입니다.

    스데반은 자신이 본 것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말을 들은 청중들은 분노합니다. 57-58절에 귀를 막고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칩니다. 신성모독자를 더 이상 신성한 종교회의 공간에 둘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릅니다. 선고절차도 무시된 채 막무가내로 끌려가서 투석형을 당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지금 스데반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증인’이라고 표현합니다. 대조적으로 스데반은 그들이 소위 말하는 신성모독죄를 저지르고 죽은 중죄인 에수의 증인입니다. 증인들이 옷을 벗어 누군가의 발 앞에 두었다는 것은 이 일에 동참했다는 의미입니다. 그 장본인이 바로 사울입니다. 이렇게 극적으로 사울이 사도행전 무대에 등장을 하지요.

    돌로 침을 당하는 스데반은 59절에 예수님을 향하여 자신의 영혼을 받아 주시기를 구하면서, 예수님의 가상칠언 가운데 한 대목과 동일하게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는 절규와 동시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스데반은 이처럼 초대교회 첫 순교자로서 자신의 운명을 예수님과 오롯이 포개어 참된 증인의 본보기를 보여줍니다. 이모든 것을 지켜 본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하게 여기며 예수공동체를 향한 더 큰 분노를 가슴에 쌓게 됩니다.

    이렇게 스데반의 죽음은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너무나 비참한 죽음입니다. 그의 죽음은 마치 실패자임을 증명하는 듯한 비참한 증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죽음과 더불어 반드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스데반은 죽기 전에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고 보좌 우편에 서 있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주님이 눈을 열어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좌 옆에 서 있는 장면’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이 장면이 유일합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스데반의 순교 과정을 귀하게 여기며 지켜보신 겁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세상의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주변에서 오늘 스데반이 경험한 순교는 없을지 모릅니다.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라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은 ‘순교적 삶’은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당하는 손해가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고, 내가 원하는 바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이라면 내려놓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돈을 버는 방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방법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방법으로 돈 벌 수 없습니다. 세상의 많은 학생들이 시험에 버젓이 컨닝을 해서 성적을 올리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정직한 방법으로 그것이 바로 ‘순교적 삶’입니다.

    비참한 단명이었기 때문에 스데반의 죽음에 대해 세상은 그의 인생을 실패고 평가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어쩌면 예수를 잘 믿는 것에 대한 세상의 관점이 이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쓸데없이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순교적 삶’은 세상의 편견 가운데에서도 ‘하늘을 통해 천상을 보는 삶’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격노한 군중이 그를 죽였지만, 그가 열린 하늘을 보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스데반을 다르게 평가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스데반의 믿음, 곧 보이는 세상이 다가 아니며, 보이지 않은 세상이 더 중요함을 확증해 주신 겁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도 바로 이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현상 그 이면의 것을 볼 수 있는 영안을 소유할 때에 우리는 기꺼이 ‘순교적 삶’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서 스데반을 응원하셨 듯,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으로 인해, 신앙으로 인해 당하는 애매한 고난에 대하여 의연하게 대처하며, 열린 하늘을 통해 부어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낯빛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실 것입니다. 그 은혜를 사모하며 매 순간 승리의 삶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어떻게 됩니까? 예루살렘은 박해가 시작이 됩니다.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부흥의 가도를 달리던 예수의 공동체는 순식간에 와해되는 위기를 겪습니다. 핍박을 피해 사방으로 성도들은 흩어집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핍박이 그들을 흩어버린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흩뿌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증인들을 유대, 사마리아,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더욱 단단해 졌고, 복음은 예루살렘 안에만 머물지 않고 비로소 유대와 사마리아로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지금 고난과 순교의 상황을 겪는 상황 속에서도 바른 신앙인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면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신앙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 전파의 사역을 멈추지 않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스데반의 순교 기사를 통해 저와 여러분, 그리고 이 땅의 교회가 세상의 평가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살아가기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이 땅에서의 죽음이 끝이 아니고, 참 평가와 인정은 오직 주님께 있음을 굳게 믿는, 믿는 자의 삶의 지향점을 놓치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세상은 죽음을 끝이자 실패로 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분과의 관계에 신실한 삶 자체가 성공이며, 주님 안에서의 삶의 마지막은 언제나 성공의 증거가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겪고 있는 ‘순교적 삶’에 좌절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칭찬과 영원한 삶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주눅 들지 않고 늘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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