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행 9:1-19

◎ 본문: 행 9:1-19
◎ 제목: 새로운 방향 설정

1. 본문 개요
    a. 행 9:1-9           사울의 회심
    b. 행 9:10-19           사울의 소명과 사명

2. 관찰
    a. 1-2절: 다메섹으로 향하는 사울
    b. 3-6절: 사울에게 친히 찾아오신 예수님
    c. 7-9절: 눈이 멀고 말 못하는 사울
    d. 10-16절: 아나니아에게 임한 환상
    e. 17-19절: 아나니아의 안수와 사울의 회복

3. 적용
    ‘폭주 기관차’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치 브레이크가 없는 것처럼 그 끝이 무엇일지 모른 채 질주하는 모습을 ‘기차’에 비유한 말입니다. 아무리 길에서 손을 흔들면서 위험하다고 표시를 해도 알아들을 리 만무하지요. 눈과 귀를 막고 오직 앞으로만 달려가는 사람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 의지를 꺾을 수 있는 당근이 있을까요? 돈으로, 권력으로, 쾌락으로 질주하는 인생은 그 어느 것으로도 되돌려 놓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다름 아닌 ‘사울’입니다.

    앞서 7장에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에 사울은 돌 던지는 사람들의 옷을 맡아 주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옷을 맡아 주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스데반의 죽음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증인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겁니다. 스데반은 그 후에 대제사장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스데반과 같은 헬라파 유대인 성도들을 핍박하는 일에 나섭니다.

    오늘 본문 1절에 사울은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채 교회를 진멸시키기 위해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다메섹에 있는 여러 회당으로 가져갈 공문을 청한 사람이 사울이라고 보고합니다. 왜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200km 이상 떨어져 있는 다메섹까지 가려고 했을까요?

    당시 다메섹은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 남쪽으로는 애굽을 연결하는 상업도시로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였고, 회당도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이 대제사장으로부터 받은 공문만 있다면 힘 있게 활동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다메섹이었습니다. 사울은 최대한 북쪽으로 가서 예수의 공동체의 확산을 차단하고 남쪽으로 소탕하며 내려올 계획을 세웠을 겁니다. 예루살렘에서 일단 다메섹까지 그물을 넓게 펼친 다음에 점점 포위망을 좁혀가는 방식으로 예수 공동체를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운 겁니다.

    사울은 대제사장의 공문도 받았고, 함께 갈 지원군도 얻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사울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그런 지원이 넉넉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지원이 있는 것이 현실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만, 사울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울은 지금 자신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자신이 달려가는 방향이 잘못 되었다고는 일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강력한 열심을 품고 다메섹에 가까이 왔던 사울 일행에게 홀연히 하늘로부터 엄청난 섬광이 주변을 둘러 비춥니다. 그 충격으로 사울은 땅바닥에 엎드려집니다. 그리고 한 소리를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8절을 보니 사울은 일시적으로 실명한 상태입니다. 오직 청각에 의존하여 상황을 분간해야 했기에 이 말을 듣자마자 말하는 대상을 향하여 ‘주여’라고 부르며 누구인지 묻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충격입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사울은 지금 예수의 도를 따르는 무리들과 공동체를 박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박해 당하는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사울이 지금 자행하고 있는 박해는 바로 자신을 박해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신앙 공동체와 자신을 한 몸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예수를 핍박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충격이 되었던 것인지 모르지만 사울로 하여금 말도 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울은 자신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하는 열심’으로 달려가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저주받은 자로 여겼던 사울은 그 도를 따르는 이들을 척결하기 위해 유대인 밀집지역인 다메섹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에 관여했던 것처럼 진리를 향한 바리새적 열심이 다름 아닌 참된 것이라 여겼지만 정작 예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사울 자신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사울의 모습을 통해 무엇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까?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성경을 모르는 이들의 지나친 열심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도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은 교회를 위한 다고 생각하며 열정을 발휘하지만 그 주변에 있는 이들은 상처뿐이고 도리어 교회의 하나 됨을 파괴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잘못에서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더욱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통찰력을 키워야 합니다. 중직자 일수록 이 부분에서 실패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과 공동체가 온전하게 세우는 방법이니까요.

    자기 신학과 확신에 가득 차, 자기 주도의 삶을 살던 사울은 하늘의 빛에 눈이 멀고 결국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울의 비참한 상황을 도리어 하나님의 도구로 만들어가는 방법으로 사용하십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한 채 기도하던 다메섹에서의 삼 일은, 하나님의 창조를 기다리던 태초의 혼돈처럼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와 성경을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거룩한 어둠요 창조적 혼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눈을 직접 여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나니아라는 믿음의 사람을 보내어 안수하여 다시 눈을 뜨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울을 성도의 공동체에 편입시켜서 공동체의 인증을 받고 공동체의 도움으로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목적이 계셨다는 것을 우리는 13절에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아나니아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은 이미 예수의 공동체 가운데에 ‘서슬 퍼런 도살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믿음의 사람인 아나니이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음성을 들었음에도 사울에게 나아가는 일은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인도하여 주의 일을 하게 할 것인지를 설명시키고, 그의 손으로 안수하여 사울을 회복시킴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예수의 공동체와 사울을 연결시키려고 하셨던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을 천국행 티켓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믿는 것을 ‘회심’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를 만남으로 인하여 그 사람의 삶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것이고 다른 사명을 위임받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단지 한 개인이 개인적인 불행에서 행복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닌 겁니다. 주인이 바뀌는 문제이고 인생의 목표가 바뀌는 문제입니다. 그릇의 주인이 바뀌는 문제가 바로 ‘구원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그렇게 다루시고 온전히 그 주인인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받아 들여 바울이 되었다면, 저와 여러분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반드시 목적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여기 이 자리에 특별히 중직자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리고 6월에 새로운 일꾼들이 많이 세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구원시키시고는 반드시 그 사람에게 ‘사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잊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직분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부르심에 온전하게 반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새벽에 다시 한 번 나를 구원하신 이유와 목적에 맞게 나의 삶을 살아드리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보고, 그 이유와 목적에 맞게 살아드리겠다 결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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