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행 9:19-31


◎ 본문: 행 9:19-31
◎ 제목: 무엇이 변하는가

1. 본문 개요
    a. 행 9:19-25           다메섹에서의 사울
    b. 행 9:26-31           사울의 예루살렘 방문


2. 본문 관찰
    a. 19-22절: 사울의 다메섹 전도
    b. 23-25절: 사울의 다메섹 탈출
    c. 26-27절: 사울과 사도들의 만남
    d. 28-30절: 고향 다소로 피신한 사울
    e. 31절: 든든히 서가는 교회


3. 적용
    ‘구원의 서정’이라는 신학적 용어가 있습니다. ‘구원의 순서’를 말하는데 이것은 시간적인 순서를 말함이 아니라 ‘논리적인 순서’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구원 사건을 논리적인 순서로 정리를 해 본 것이지요. 우리가 세례 교육을 받을 때에 다 듣고 교육을 받은 겁니다. 그 과정의 머릿글자를 따서 ‘소중회 신칭수 성견영’ 이렇게 암송을 하기도 합니다. ‘소명-중생-회심-신앙-칭의-수양-성화-성도의 견인-영화’ 이렇게 우리의 구원은 6단계의 논리적 순서를 가진다고 조직신학적인 관점에서 정리를 해 볼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결코 이것은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했습니다. 소명 다음 중생, 이런 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모든 ‘논리적 순서’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인정하는 순간 단번에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지요. 이러한 ‘구원의 서정’에서 논리적 순서 상으로 ‘회심’을 유심히 살펴보면 중생, 즉 ‘다시 태어남’과 신앙 즉 ‘자신이 죄인 임을 깨닫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주이심을 확실히 믿음’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회심’이라는 것은 단지 믿는 대상에 대한 고백이 바뀌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회심’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존재가 자신이 정말 죄인이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유일한 구주로 인정하는 확실한 믿음에 놓이도록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는 ‘사울의 변화’는 예수와의 만남이 가져오는 ‘회심의 역사’가 얼마나 전인격적인 변화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줍니다. 신분과 소속이 완전히 바뀌고 삶의 방식 또한 완전히 바꾸어 버립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사울에게는 어떤 변화가 찾아 왔나요. 오늘 말씀을 통해 함께 그 변화를 발견하고, 나에게도 그런 변화가 있는지를 되물어 보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메섹 사건은 사울의 모든 것을 바꿔 버렸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그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공동체 소속의 변화’이지요. 그는 유대교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과 소속감을 가지고 종교권력의 중심부를 향해 질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정반대 방향으로 전환하여 핍박하던 예수 공동체 안으로 들어 왔습니다.

    사울은 아나니아의 안수로 눈이 떠진 즉시 다메섹 회당의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되신다.’고 선포합니다. 그는 왜 이렇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까? 신성모독 죄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여겼던 예수님이, 사실은 자기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죄의 저주 아래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 돌아가셨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죽음은 죄인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한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의 고난이었음을 깨달은 겁니다.

    이렇게 180도 달라져 버린 사울의 말을 듣는 이들은 21절처럼 다 놀라게 됩니다. ‘아니 예루살렘에서 예수 이름 부르는 자는 다 멸하려던 사람 아닌가? 저거 가짜 아니야? 저런 식으로 해서 예수 믿는 사람 다 대제사장에게 끌고 가려는 술수 아니야?’라고 모두 의심하였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더욱 진정성을 가지고 자신이 변화되었음을, 그리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언하자 다메섹의 유대인들은 당혹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도를 좇는 이들을 진멸하겠다던 사울이, 스데반을 죽이는 데 앞장섰던 사울이 그 예수를 전하는 것을 보고, 다메섹과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다메섹에서는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한 계획이 사울에게 알려져서 밤에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 달아내려 겨우 도망을 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여러 제자들과 사귀고자 하였지만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았지요. 하지만 바나바가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과 만나게 하고 사울이 다메섹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고 어떻게 담대히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였는지를 설득하자 예루살렘 교회 가운데 그가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지만 역시 예루살렘에서도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짜’를 깨닫게 되면 삶이 안 바뀔 수가 없다는 사실을 사울의 모습을 통해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가 진짜 메시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며, 성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 예수 추종자들을 죽이려 했던 사울은 이제 예수를 위해 목숨도 던질 각오로 달려가는 모습을 봅니다. 복음을 핍박하던 자가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는 자로 변했다는 거죠. 깨닫게 됩니다. 참 복음에는 ‘환영과 거절’이 늘 동반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예수를 믿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면, 분명 우리를 환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환영 받지요. 하지만 이전에 예수를 모르고 살아갈 때에 맺었던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선 ‘거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지금 예수 믿기 때문에 세상과의 단절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나의 삶이 예수 믿기 이전과 전혀 상관없이 인간관계에서나 전혀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면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완전한 삶의 방향의 변화가 있는지, 여전히 죄를 향하여 달려가는 나의 삶의 자리가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지요. 내 삶에서 예수로 인하여 거절당해 본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온전히 회심’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증거가 됩니다. 다시 한 번 ‘신자’로서의 나의 삶을 점검해 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울은 회당에서는 배척받았지만 다메섹 공동체의 새로운 일원이 되었고, 바나바의 중재로 여전히 사울의 회심의 진정성에 의심을 거두지 않았던 예루살렘 공동체와도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는 자신의 형제들을 죽이고 위협했던 자를 주 안에서 가족으로 받아 주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과정에서 다메섹의 아나니아와 예루살렘의 바나바의 역할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를 통해 누군가가 주의 일꾼이 되고 은사를 발휘하고 적절한 일과 자리를 찾아가는 통로의 역할을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몸소 주의 일꾼이 되는 것만큼 누군가를 일으키고 세우는 일도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의 주변을 은혜의 눈길로 바라볼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사울의 신학과 가치관과 인생의 목표 전체에 변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울에게만 있었던 특별한 일이 아니라 모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고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지금 세상의 세계관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수용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변화가 각 성도의 삶에 일어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 정상적인 변화가 나에게 일어났고, 또한 일어나고 있는지를 날마다 돌아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내가 주를 위해 쓰임 받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쓰임 받아야 할 사람이 나를 통해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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