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행 9:32-43

◎ 본문: 행 9:32-43
◎ 제목: 경계를 넘어서

1. 본문 개요
    a. 행 9:32-35           베드로와 중풍병자 애니아
    b. 행 9:36-43           베드로와 다비다


2. 본문 관찰
    a. 32-33절: 룻다의 중풍병자 애니아
    b. 34-35절: 애니아를 치유한 베드로
    c. 36-37절: 욥바의 다비다

    d. 38-41절: 죽은 다비다를 살린 베드로
    e. 42-43절: 욥바의 베드로


3. 적용
    복음은 어떠한 사람도 소외시키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인종, 어떤 성별, 어떤 지위, 어떤 경제적 위치에 있는지에 대해 복음은 관심 없습니다. 단지 복음은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누구든지’ 바로 그 사람에게 복음이 됩니다. 그야말로 ‘만국을 위한 복음’인 셈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사망의 아래에 있으니 그들 모두에게 생명의 길은 열려 있습니다. 그 어떤 장벽도 이 복음이 가는 길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하기에 혹 이 복음을 막아서는 모든 것, 하나님의 사랑의 질주를 막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유대인을을 피해 고향 ‘다소’로 피신했다는 내용이 앞선 29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32절부터 중심인물이 베드로로 옮겨갑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세례 이후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전하며 예루살렘을 복음으로 물들였습니다. 사마리아 성에서는 빌립의 사역으로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은 성도들에게 안수기도를 통해 성령이 임하는 역사를 이끌었습니다. 그렇게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로 넘어갔고, 이제 이방으로 넘어가야 할 단계에서 다시 한 번 베드로의 역할이 더욱 부각됩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40km정도 떨어진 도시 룻다의 성도들을 방문하여 돌보던 중에 중풍병으로 8년을 누워 있던 남자 애니아를 고칩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에만 머물지 않고 점점 그 지경이 넓어지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또한 베드로가 사방으로 흩어져 소수 공동체를 형성한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찾아가고 살핀 결과 실제적인 필요를 발견하게 된 좋은 예로 ‘애니아의 병고침 사건’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던 일을 연상케 합니다.

    34절에 베드로가 중풍병자 애니아를 고치는 모습 가운데 주목할 것은 베드로의 말입니다.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기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말하자 애니야가 곧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는 왜 이렇게 말하면서 병 낫는 기적을 일으켰습니까? 베드로는 철저하게 이 치유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에 의해 회복된 애니아를 본 사람들은 다 베드로가 아니라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시선이 집중되기를 원하는 유혹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이루어 냄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고자 하는 욕망은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구원 받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 있는 죄 된 본성은 얼마든지 사람의 시선을 자신에게 향하기를 즐기게 합니다. 그것을 극복할 방법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나의 삶과 사역을 통해 사람들의 시선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삶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36-43절에서는 ‘욥바’에서 일어난 기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욥바는 룻다에서 북서쪽으로 약 20km, 예루살렘에서는 60km 떨어진 지중해의 항구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이기도 합니다. 욥바에 사는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죽습니다. 아람어로 ‘도르가’라고도 불리는 여인이었습니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참 많았던 여제자의 죽음에 다른 제자들은 약 20km 떨어진 룻다에 사람을 보내 베드로가 오기를 청합니다.

    제자들이 보기에 그렇게 죽기에는 너무 아깝고 안타까울 만큼 다비다는 선행과 구제에 본이 되는 여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죽은 자를 살리고 자신도 죽음에서 살아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베드로라면 이 죽음마저 극복할 수 있으리라 여겼고, 베드로에게 와 달라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를 청한 것은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뿐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생시키는 능력은 우리에게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거듭남의 능력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면, 우리가 세상 가운데 감당해야 할 역할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베드로처럼 ‘생명의 길’이 오직 ‘선명한 복음’에 있음을 전하고 가르치며 실천하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40절에 먼저 사람들을 다 내 보냅니다. 이 장면은 막 5장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던 그 절차 그대로 다비다를 살리는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우는 자들을 다 내보내고 베드로는 무릎 꿇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향해 ‘달리다 쿰’, 즉 소녀야 일어나라고 명령하셨던 것처럼, 베드로는 ‘다비다 쿰’,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명령하여 다비다를 살려냅니다.

    이 사건을 통해 다비다 뿐만 아니라 욥바 사람들이 주를 믿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우리는 오늘 베드로의 놀라운 치유와 생명을 살리는 기적을 통해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놀라운 기적을 위해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지체를 향한 성도들의 사랑’과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 더불어 ‘사역자의 믿음에 따른 순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어느 것 하나도 빠져버리면 ‘사망의 땅에 찾아오는 일’은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대중앙교회 가운데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원하시는 분들마다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 사랑과 믿음’을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지체를 향한 사랑’이 없다면 아무런 기적도 시작될 수 없었습니다. 욥바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헌신했던 여제자 ‘다비다’의 죽음 앞에 너무나 비통해 하며,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사랑이 룻다로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데리고 오게 만들었습니다.

    더불어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역자’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일을 감당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기에서 사역자들은 결코 목사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역장님들, 식당봉사, 주차 안내, 다음 세대를 가르치는 교사들 등등 모두가 사역자입니다. 사역자의 마음속에 자신의 힘과 능력, 지혜와 성실함으로 맡겨진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여기는 것은 교만이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의 손과 발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은 일을 맡은 사역자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온전히 감당할 때에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순종에 근거한 행동’에 의해 만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순종은 우리가 상상치도 못한 놀라운 일이 이루어지게 만듭니다. 룻다도, 욥바도 모두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서는 이방인은 향한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역사를 이루고 베드로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뭅니다. 율법의 정결법을 따른다면 가죽을 취급하는 곳은 부정하기에 베드로는 머물러선 안 됩니다. 하지만 그는 과감히 행동함으로 말미암아 이제 복음은 이방에게 전해지고, 땅 끝을 향하게 되는 겁니다. 매 순간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 가지고 매 순간 복음으로 도전하여 땅 끝까지 주님의 증인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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