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행 13:32-52
◎ 제목: 썩지 않는 영원한 생명
1. 본문 개요
a. 행 13:32-43 회당에서 바울의 설교(2)
b. 행 13:44-52 유대인들과의 변론 그리고 추방
2. 관찰
a. 32-37절: 다윗과 예수
b. 38-41절: 예수를 힘입은 의
c. 42-43절: 무리들의 긍정적인 반응
d. 44-48절: 유대인의 시기와 이방인의 구원
e. 49-52절: 유대인의 공격과 추방
3. 적용
오늘 본문은 바울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설교 후반부와 그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과 변론 후 그 곳에서 추방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어제 새벽에 살펴본 바울의 설교의 전반부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전개된 하나님의 계획이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 복음이 예수에게서 제자들에게, 바나바를 거쳐 바울에게 이어졌고, 이제 이방 곳곳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거죠. 이제 오늘 살펴보고 있는 설교 후반부의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썩지 않고 복음은 멈추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여러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증언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더 근본적으로는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의 관점으로 살피면서 설교합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이 알고 있던 구약을 전혀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앞선 행 13:27에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의 의미를 바울 자신도 알지 못했는데, 부활의 예수를 만난 후에는 숱한 예언들이 그의 부활을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메시아 약속으로 익숙한 세 구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려고 합니다. 먼저, 33절에서는 시 2:7,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의 왕위의 영원성을 보증하시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의 말씀은 혈통적 의미에서 다윗의 후손들이 끊이지 않고 대를 이어서 이루어질 약속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아들이라’라고 말씀하신 그가 영원한 왕이 될 때 성취되는 약속이지요. 그렇다면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의 그 아들이라는 말입니까? 바울은 부활을 통해 예수님이 신적 기원을 가진 바로 ‘그 아들’임이 확인되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왕위를 잇는 영원한 아들이시며, 그를 통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새 시대가 이 땅 가운데 임했습니다.
두 번째로 인용된 구절은 34절에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라는 이사야 55:3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약속하신 복이 삼하 7장에 나타나는데, 이것을 이사야 선지자가 재차 언급하였습니다. 바울은 약속하신 그 복들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베풀어졌다고 증언하고 있는 셈입니다. 예수의 왕권이 영원하듯 그가 베푸시는 복들도 영원하며, 썩지 않는 복이라는 거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 썩음을 당치 않게 했다는 겁니다.
마지막 인용 구절은 35절에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라는 시편 16:10입니다. 이 말씀 역시 ‘거룩한’과 ‘썩지 않음’을 반복해 그의 영원성을 약속합니다. 베드로도 오순절 설교 때에 이 구절을 인용하였습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거룩한 자’라는 예수의 정체성을 다윗과 비교해 좀 더 설명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지만, 유한한 존재로서 자신의 시대에 작정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뿐이라는 겁니다. 신실한 다윗은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썩음을 당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인용한 이 다윗의 시편은 결코 다윗 자신을 두고 한 고백일 수가 없습니다. ‘썩음을 당하지 않는 거룩한 자’에 대한 약속으로 이 시편을 이해해야 한다는 거죠.
바울은 이렇게 말씀의 인용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히 몇몇 증인의 증거로 인하여 확인될 사건이 아니라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이 예수의 부활로 성취되었음을 변증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를 힘입어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이 약속의 복들을 누릴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이는 즉, 구약의 임시방편적 방식이 아닌 근본적 죄 용서가 예수 그리스도로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39절에 바울은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예수님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온전한 의는 모세의 율법으로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죄 용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청중들에게 계속 설명하면서, 바울은 그들로 하여금 예수를 알고 믿어 죄사함과 의롭다하심을 받기를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41절에서 하박국 1:5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에도 이스라엘은 끝까지 하나님을 멸시하고 거절하였고, 결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지 않습니까? 그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가져온 복이 영원하듯 그를 거부하여 받게 될 멸망도 동일하게 영원하다는 말이지요.
이러한 바울의 설교에 청중들은 뜨겁게 반응합니다. 다시 복음을 듣기 원하여 다음 안식일에도 와달라고 청합니다. 다음 안식일에 초청 받은 바울 일행이 회당에 방문하자 비시디아 안디옥의 더 많은 시민들이 말씀을 듣고자 모였습니다. 상황이 달갑지 않은 유대인들은 극심한 질투심으로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면서 비방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모습에 ‘사 49:6’을 인용하면서 유대인의 거절로 인하여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수혜자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러자 많은 이방인들이 크게 기뻐하며 복음을 받아들이지요. 유대인 지도자들은 시기로 가득하였고, 회심한 이방인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비열한 방식을 동원합니다. 힘을 가진 여성들과 행정 관리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겨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자 두 사람은 기꺼이 그 지역을 떠나며 발의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향합니다. 기둥과 같은 두 영적 지도자가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52절에 비시디아 안디옥에 남겨진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하여 교회를 일구게 되었음을 알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바울의 설교를 통해 우리는 복음이 너무나도 선명한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약속의 성취로서 예수의 부활과 죄 사함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덧입거니와 이를 거절하는 이에게는 진노의 심판이 임한다.’는 것이 바로 복음의 명확한 명제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기쁨과 성령의 충만함이 임합니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거짓된 종교성은 시기와 경쟁과 탐욕을 유발할 뿐입니다. 복음은 기쁨과 자유와 영의 생각을 창출하지만, 그릇된 종교성은 끊임없는 탐욕으로 인하여 끌어내리고 짓밟는 일만 남깁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처럼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했듯 배척과 독선만 남습니다. 그러나 결코 사역의 방해가 실패는 아닙니다. 박해와 추방이 성령의 역사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거절과 핍박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멈추지 않습니다.
이 새벽에 우리 모든 성도들은 부활의 주님을 믿는 자들로서 썩지 않은 영원한 생명을 기대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복음을 막아서는 어둠의 세력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고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썩을 세상으로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생명의 나라의 복음을 늘 선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이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