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강도사 / 행 14:1-18

◎본문: 행 14:1-18

◎개요

1-7절 이고니온 전도

8-18절 루스드라 전도

◎본문연구

오늘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 은혜가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1절부터 7절까지는 이고니온에서 전도하는 내용이고 8절부터 18절까지는 루스드라에서 전도하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난 바울과 바나바는 약 1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이고니온으로 가게 됩니다. 이고니온은 농업과 상업 중심의 도시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평소처럼 가장 먼저 회당을 찾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이고니온 회당 역시 비시디아 안디옥처럼 유대인과 헬라인이 함께한 공동체입니다. 그들의 반응은 비시디아 안디옥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허다한 무리가 두 사람이 전한 복음을 받고 믿게 됩니다. 앞서 그랬던 것처럼 안식일 회당에서 성경을 낭독한 후 설교를 이어갔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하지만 그에 상반되는 반응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늘 그렇듯이 복음 앞에서 수용과 거절은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거절한 유대인들을 2절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거절한 자들에게 이렇게 선포했죠.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여기에서도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했겠죠. 유대인들은 복음에 저항하고 도리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해 바울과 바나바에게 악감정을 품게 합니다. 이것은 유대인 리더들이 민심을 선동하는 전형적인 수법이죠. 무리의 호응이 컸던 만큼 저항도 컸겠죠. 그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악한 감정을 주입해서 악한 행동을 하게 만들려고 애썼습니다. 그런 선동과 공작에도 불구하고, 바나바와 바울은 최대한 머물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누가는 주께서 그들과 함께하사 두 사람의 손을 통해 놀라운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다고 기록합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함께하신 주님을 의지해 표적과 기사를 행하며 담대히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이고니온 사람들을 두 부류, 복음을 수용하는 사람들과 거절하는 사람들로 갈랐습니다. 본문 3절과 14절에서 누가는 여기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향해 사도라는 칭호를 붙입니다. 사도는 열두 제자와 바울에게 국한된 특정 칭호이지만, 누가는 여기에서 유대 예루살렘 사도들의 사역과 이방인 사역을 대비하면서 안디옥 교회가 파송한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죠.

이제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인에게 주입된 억하심정이 분출합니다. 저항은 조직적이고 폭력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 악한 사상을 퍼뜨리는 자들로서 도시 밖으로 쫓아내야 한다고 선동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그러했듯이 공권력을 움직여 용인된 폭력이 자행된 것이죠. 돌을 던지는 혐오적 폭력을 유대인들이 율법에 열심을 표현하는 익숙한 방식이었는데, 이방인들도 여기에 가담하게 되죠.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의 계략을 미리 알고 피해 루스드라와 더베로 옮기며 복음을 전합니다.

앞서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회당을 복음 선포 장소로 찾았습니다. 하지만 루스드라에서는 회당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을 반대하는 유대인들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따라온 자들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가 이 루스드라 출신이죠. 이고니온에서 많은 표적과 기사가 있었지만 누가는 단 하나의 사건도 소개하지 않는데 반해 루스드라 사역 이야기는 놀라운 기적 사건으로 시작을 합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어떤 사내가 등장을 하면서 시작하죠. 공개 장소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그가 바울의 말을 유심히 듣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태도를 주목했고, 그에게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확인합니다. 직역으로는 구원을 위한 믿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선언이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합니다. 바울은 큰소리로 그 사내에게 일어설 것을 명했고, 즉시 일어서는 기적을 맛보게 합니다. 평생 단 한 번도 걷지 못했던 그가 뛰며 걷습니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이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신들의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고 하며 소리를 지릅니다. 이들이 외친 신들은 다름 아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와 헤르메스였죠. 바나바를 제우스로, 사도 바울을 그의 아들 헤르메스로 생각했습니다. 제우스와 헤르메스는 이 지역 수호신으로 숭배 대상이었습니다. 걷지 못한던 자가 일어났다는 기적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고,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는 즉시 환대와 제물을 바치기 위해서 소와 화환을 가지고 바울과 바나바를 맞으러 나옵니다. 무리도 열광을 하며 제사장을 따랐습니다.

두 사람이 순식간에 그 동네의 신으로 추앙받습니다. 두 사도가 군중들의 왜곡된 열망을 까무러치듯 막아섭니다. 누가는 두 사도가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로 뛰어 들어갔다고 기록합니다. 옷을 찢는 행위는 유대인들이 신성모독과 같은 심각한 발언과 행동에 분노를 표하는 방식이죠. 이 무리들의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죠. 당장 저지하기 위해서 군중 속으로 뛰쳐나가 소리를 높여 외친 것입니다. 바울의 설교가 다시 시작됩니다. 자신들은 신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성정의 사람이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이런 행위는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금하시는 우상숭배의 헛된 일이며, 이것을 금하기 위해 지금 자신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만 섬겨야 하고, 우상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로서 복음에 합당한 반응이 아니라고 외칩니다. 루스드라에서의 바울의 설교는 앞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증언했던 복음의 중심 내용인 예수님을 제대로 담고 있지 않아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전도를 위한 설교가 아니라 소동을 잠시 중단시키려는 변증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울의 메시지는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은 오직 복음의 실체인 예수님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이방인 청중을 위한 바울의 유연한 설교로 보는 것이 맞는 것이죠.

바울과 바나바는 이렇게 쫓겨나고 핍박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우상숭배하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바르게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도 구원받은 은혜를 늘 간직하면서 살지 않습니까. 우리 안에 용암같이 그 뜨거움, 식어지지 않는 그 영원한 사랑이 있기에 오늘 하루도 감사하며 은혜를 누리시며 기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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