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행 15:1-5
◎ 제목: 은혜로 받은 구원
선교에는 장벽이 참으로 많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 선교를 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벽은 다름 아닌 유대인들의 ‘율법’으로 인한 편견이었습니다. 이런 겁니다. ‘이방인은 부정하고 선결 조건인 할례가 없으니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오랜 편견과 신념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앞선 행 10장에서 고넬료의 회심을 통해 베드로에게 이방인을 향한 구원의 문을 여셨음을 ‘사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15장에서 ‘예루살렘 공회의’라는 공적인 자리를 통해 이 문제를 수면 위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드러내셨습니다.
이방인을 향한 전도가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본격화 되면서 이들의 사역에 딴지를 거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이른바 ‘할례’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이방인들이 구원 받을 수 있느냐는 문제를 끄집어 낸 겁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의 핵심적인 주장은 이런 겁니다. ‘믿음만으로는 안 된다. 할레를 더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면 ‘은혜와 믿음’을 강조하던 바울의 가르침은 부정됩니다. 그리고 ‘믿음과 할례가 함께 여야 한다.’는 주장은 결국 복음을 ‘유대교화’하려는 시도에 다름 아닌 겁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에 할례를 더해야 한다.’는 주장은 사실 정치적 계산이 짙게 깔려 있는 주장입니다. 이들이 고집을 부리는 이유는 사마리아 인들 때문입니다. 성도님들도 잘 아시다시피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분열된 이스라엘은 각각 다른 나라에 의해 멸망을 당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먼저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그 뒤에 BC 586년에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되었습니다.
각 나라를 멸망시킨 ‘앗수르와 바벨론’은 각각 다른 ‘포로 정책’을 펼쳤습니다. 앗수르는 점령지역의 사람들의 일부는 남겨주고 일부는 포로로 끌고 갑니다. 남겨진 사람들은 앗수르가 다른 나라에서 잡아 온 포로들을 데리고 와서 ‘통혼’을 통해 ‘혼혈화’시킵니다.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다시 다른 정복당한 나라에 심겨져서 그 나라 사람과 결혼을 통해 그 곳에 정착해야 했습니다. 이런 정책은 앗수르가 정복한 나라의 정체성을 흔들 목적인 겁니다.
하지만 앗수르의 정책은 그 지역에 뿌리를 내린 ‘혼혈족’에 의해 강력한 공동체가 형성되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앗수르는 남겨 놓는 자들과 데려가는 자들 출신성분을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도자 급의 사람들이 남겨 졌을 경우, 비록 핏줄로 정의되는 정통성을 부정당했을지 모르지만, 리더들에 의해 강력한 공동체를 형성하였지요. 그 공동체가 바로 ‘사마리아 공동체’가 된 겁니다.
반면에 남 유다를 정복한 바벨론은 정복한 지역의 왕족과 귀족 등 지도자급들을 무조건 포로로 다 끌고 갑니다.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을 통치하기 위한 총독을 파견하여 다스립니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반란’의 씨앗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똑똑하고 리더십이 있는 사람을 남겨 두면 그들은 반드시 우환이 될 것이라 여긴 겁니다. 그래서 바벨론은 지도자들을 자신들의 수도로 끌고 와 자신들의 교육과 문화로 그들을 물들입니다. 하지만 남겨진 사람들은 지리멸렬하기에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 되는데 실패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남유다의 유민’들의 공동체는 혈통적으로는 정체성을 지켰을지 모르지만, 늘 ‘사마리아 공동체’에게 피해 의식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바리새파’에 의해 ‘율법’을 강조하는 경직된 유대교에 뿌리를 둔 ‘율법주의자’들은 사마리아 공동체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에 그들을 ‘개’같이 여겼습니다. 그들을 상종하지 않은 겁니다. 피가 더럽혀졌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의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다는 주장으로 유대교를 폐쇄적 집단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직성은 결국 ‘세리와 창녀’와 같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국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도 그런 위선적 유대교에 깊이 뿌리 내렸던 사람이기에, 예수님을 만난 직후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편협한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예수의 정신은 결국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의 은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유대교의 그러한 편협함과 계속해서 싸웠습니다. 1차 선교여행을 마친 바울이 안디옥에 와 있는 동안에 유대로부터 온 ‘유대인 그리스도인’ 중에 할레를 받지 않으면 능히 구원 받지 못한다는 변질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듣고는 그들과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을 벌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예루살렘 교회에서 공론화해야 한다는 안디옥의 형제들의 결정에 따라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지요.
베니게와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에 이른 바울과 바나바는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이 이방 지역을 돌면서 뿌린 복음의 씨앗이 어떻게 열매를 맺었는지에 대해 열심히 보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5절에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이방인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합니다. 문제 제기는 안디옥에서 ‘유대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 제기한 것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할례 없이는 구원 없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 안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복음 아닌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아닌 것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잘라내 버리면 됩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본질이 아닌 ‘비본질적인 것’이 ‘본질 흉내’를 내려 할 때입니다. 이것은 구별도 잘 되지 않아서 단번에 끊어버리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과거에 익숙했던 ‘예배 순서’가 갑자기 바뀌는 것일 수 있습니다. ‘본질적인 예배 순서’라는 것은 없습니다. 영과 진리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신학적 원리’에 부합한다면 순서와 형식은 변화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과 진리’로 그 예배가 드려지느냐 아니냐의 문제이지요. 교회는 때로 ‘성경, 복음’과 상관없는 문화와 전통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본질’을 잘 반영한 문화와 전통도 있습니다. 그것은 지키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영향력 있는 사람에 의해 세워진 ‘전통과 문화’인데, 마치 그것이 성경적 진리인 냥 포장되어서 계속 답습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유대교 전통에서 할례가 있으니 그것도 지켜야 구원 받는다.’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성경적 원리로 돌아간다는 것은 ‘진리가 아닌 치우친 시선’으로 상황을 보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결국 교회 안에서의 갈등은 깊어지고 복음의 영향력은 정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전대중앙교회가 늘 ‘진리’를 따라 갱신되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 개신교의 시작을 알린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개혁된 교회는 거듭 개혁되어져야 간다.’는 생각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도 실천해야 할 덕목입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개혁되어 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지 않았지만 6-11절에서는 바울과 바나바가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에 대해 말하자 격론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많은 변론들이 있었고, 결국 종지부는 ‘베드로’에 의해 지어집니다. 베드로는 ‘사적’으로 이방인에게 임한 구원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셨다는 뜻이며, 더는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할 근거가 사라졌다고 증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 외에는 구원을 위한 선결 조건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우리 마음속에 아로새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한 목사님께서 설교를 통해 ‘믿음으로만 구원 받음’에 대해 말씀하신 예배가 마친 후에 한 청년이 목사님께 이렇게 질문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그런데 말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제가 보기에는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사람을 죽인 살인마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으면 그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 입장에서는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닐까요? 더군다나 그 죽임을 당한 사람이 평소에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었다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들 거라는 말이지요.’가고 말하면서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한 겁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청년 말대로 믿음으로 구원 받음이 불합리하다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떤 기준으로 우리를 구원하셔야 할까요? 청년 생각에는 ’선행‘이 기준이 되면 좋겠나요? 그렇다면 ’선행‘이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아까 전에 말했던 살인자 말입니다. 그 사람이 좋은 부모를 만나서, 좋은 교육 환경 가운데 있었다면 그렇게 살인자의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반대로 그 살인자에 의해 죽임을 당한 법 없이도 살았을 것이라 평가받은 사람도 만약 좋지 못한 가정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하고 어릴 때부터 범죄에 노출되는 인생을 살게 되었다면 과연 선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어떤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된다면 그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지구상에 어떤 사람도 결코 동일한 환경과 조건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출발점 자체가 다를 수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시작부터 다른 사람이 빚어 놓은 결과를 가지고 그 사람을 구원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더 불합리한 것 아닐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공평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신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모든 인간을 향한 가장 공평한 기준이기 때문이지요.”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전대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 은혜인 이유는 바로 ‘믿음’이라는 기준은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공평한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이 새벽에 하나님께서는 먼저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묻고 계십니다. 이 공평한 기준에 너희는 다 동의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공평하다 확신한다면 과연 너희의 구원의 근거는 바로 그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또한 묻고 있습니다. 내 부모가 신앙생활 열심히 했으니 나는 대충 믿어도 구원 받는다는 생각이든지, 내가 이렇게 열심히 믿으니 혹 신앙생활 안하는 우리 남편, 자녀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봐 주시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진리에 어긋난 나의 ‘구원에 관한 기준’의 문제는 없는 것인지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구원은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내 선행이나 공로가 아닌 오직 은혜로만 우리는 구원을 얻습니다. 이 구원의 진리를 온전히 깨닫고 그 진리에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의 귀한 신앙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