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행 15:12-35
◎개요
12-21절 예루살렘 사도회의: 야고보의 결의
22-29절 이방 교회에 보내는 편지
30-35절 유대 교회와 이방 교회의 하나 됨
◎본문연구
오늘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 은혜가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크게 3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2절부터 21절까지는 예루살렘 사도회의, 특별히 야고보의 결의에 대한 내용이고, 22절부터 29절까지는 이방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대한 내용이며, 30절부터 35절까지는 유대 교회와 이방 교회가 하나가 되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유대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중심의 이방 교회가 가장 넘기 어려운 인종, 민족, 종교적 담을 넘는 대목입니다. 사도회의의 진행 과정과 결정 그리고 후속 대응이 매우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죠.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며 복음의 진보의 계기를 마련하는 모습입니다. 이후 사도 바울의 거침없는 이방 선교가 펼쳐지죠. 서로를 향한 존중과 예의 그리고 배려와 사랑이 진하게 묻어나는 본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할례와 율법 문제가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의 발언에 대한 유대 형제들의 추가 변론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온 교회가 가만히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사도의지지 발언에 안디옥 측이 흥분하지 않았고, 예루살렘 측이 더 정교한 논리로 반박하지도 않았습니다. 양측의 침묵은 단지 소극적 태도만이 아니라, 내주하시는 성령의 발언을 들은 자들의 적극적 반응으로서의 침묵이죠. 잠시 후 이방인을 대변하는 바나바와 바울에게 발언권이 주어집니다. 다시 한 번 예루살렘 교회가 두 증인의 입술을 통해 성령이 이방인들에게 행하신 표적과 기사의 증언을 듣습니다. 이제 예루살렘 교회 대표 리더인 야고보가 형제들에게 경청을 요구하며 결론적 진술을 결의문 형식으로 담아냅니다.
야고보는 앞선 베드로의 진술을 자신의 말로 요약하며 시작합니다. 베드로를 통한 이방인의 구원, 바로 고넬료 사건과 성령 받음을 두고 야고보는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사건이라고 하죠. 두 측면을 강조하는데, 먼저 14절에 처음으로라는 단어를 통해 이방인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갖고 시작하신 일임을 강조합니다. 그 일은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하기 위해서 돌보신 사건이라는 점을 또한 강조합니다. 특히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두고 등장하기 때문에 이방인의 편입은 역사적 사건이며 예루살렘 교회가 환영해야 할 일인 것이죠.
야고보는 베드로의 증언이 사적 경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과 일치한다며 성경적 증언과 연결짓습니다. 바로 아모스 9장 11절, 12절 말씀의 성취로 보는 것이죠. 아모스 말씀은 두 가지 약속을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어 일으키신다는 약속과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신다는 약속이죠. 예수님을 통해 무너진 다윗의 나라를 세우셨고, 성령을 보내셔서 이방인들을 모으셨죠. 이 모든 일을 주도하시며 시작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죠. 확실한 증거와 증인의 증언이 있고, 그 모든 것이 탄탄한 성경적 근거를 갖습니다. 이에 야고보는 자신의 판단을 이렇게 정리해서 선언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우리가 괴롭게 하지 말자.
베드로의 증언처럼 본인들도 지기 어려운 무거운 멍에를 지워서 괴롭히지 말자는 것이죠. 할례와 율법 준수의 입장을 반대하며 이방인들의 입장에 완벽하게 손을 들어준 선언입니다. 하지만 유대인을 위해 이방인들이 몇 가지를 삼가도록 당부합니다. 권면이죠.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 이는 유대인들의 삶에 깊게 배인 신앙 양심의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저버리면 신앙 양심에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이기에 사랑과 포용과 덕을 위해서 꼭 자제해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을 편지에 싣자는 것이죠. 이 내용은 레위기 17장에서 18장에 등장하는 의식법들을 반영한 내용이지만, 이방인들에게 적용한다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 네가지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내용들은 이방인들에게는 익숙한 신전 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은 우상숭배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이기에 습관이 된 삶의 방식을 벗어버릴 신앙적 책임이 이방 성도에게 주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본질은 타협할 수 없지만 비본질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상호 양보할 수 있는 것이죠.
사도행전의 앞선 본문에서 안디옥 교회의 성숙한 결정들이 몇 차례 나왔고 이제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와 장로들을 중심으로 온 교회가 야고보의 결정을 적극 지지하며 이방 교회에 서한을 보내기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편지만 들려 보내지 않고 대표단을 꾸려 바울과 바나바 일행과 함께 안디옥 교회로 파견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배려와 진심이 드러나죠. 이 일에 유다와 실라가 뽑혀 동행합니다. 두 사람 손에 들린 공식 편지는 야고보가 결의한 내용을 골자로 한 회람 서신이었습니다. 발신자는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이고, 수신자는 안디옥과 수리아,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 형제들이죠.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 때 세운 공동체들입니다. 야고보는 이방 형제들의 고민가득한 마음을 헤아리듯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그곳에 방문한 사람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대변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그들의 말에 괘념치 말라고 안심시킵니다.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 편에 대표단을 선발해서 보냄을 알리고 특별히 발신자인 자신들을 예수를 위해 생명도 아끼지 않는 자들이라고 정의하며 신뢰감을 높입니다. 그리고 만장일치로서, 이런 결정에 추호도 분열과 이견이 없었다는 점도 강조합니다. 이방 교회 형제들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진심 어린 애정이 묻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방 형제들에게 어떤 것도 짐 지우지 않겠다는 답변과 사도회의 때 결의한 네 가지 사항, 우상의 제물과 피, 목매어 죽인 것, 음행, 이 네 가지는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기 위해서 스스로 멀리할 것을 당부합니다.
안디옥 교회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도 성숙한 결정을 하는 모습을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방인이라고 폐쇄적으로 대했던 유대교회였지만, 이제는 이방 교회와 하나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이렇게 하나 됨으로 인해서 선교적 사명에 더욱 불을 지필 수 있는 계기가 되죠.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의 지속적인 가르침과 전도사역을 이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많은 우리를 구원하심에 있어서 결코 폐쇄적으로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그러하셨다면 우리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었겠죠. 하지만 예수님의 구원은 모든 인류에게 열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든지 그 이름을 주로 시인하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혹 우리가 마치 유대인들과 같이 예수님의 구원하심에 폐쇄적인 믿음에 치우쳐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시고,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때라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면 믿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되는 진리를 믿으시고, 우리의 닫힌 마음 문을 여시고 전도의 문을 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