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행 17:1-15

◎ 본문: 행 17:1-15
◎ 제목: 복음의 진격

1. 본문 개요
    a. 행 17:1-9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로
    b. 행 17:10-15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로

2. 관찰
    a. 1-3절: 세 안식링레 회당에서 복음 선포
    b. 4-9절: 유대인들의 시기와 고발
    c. 10-12절: 회당 전도와 긍정적 반응
    d. 13-15절: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의 지속적 방해

3. 적용
    로마를 향한 복음의 기세가 거침없이 흘러가는 것을 봅니다. 마게도냐 첫 성 빌립보에서 시작하여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그리고 아덴을 향하여 복음은 거듭 진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물론 환대보다 냉대가 더 많은 상황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기세를 꺾어보려고 악한 세력dl 안간힘을 쓰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결코 복음의 기세를 꺾을 수는 없었고, 바울을 통한 이방 선교는 점점 확장되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그렇게 치열한 옥고를 치르고도 복음의 열정을 불태웁니다. 바울 일행은 빌립보 인근 도시인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통과하여 곧바로 마게도냐의 주도 ‘데살로니가’로 향합니다. 이 곳은 빌립보와 달리 유대 회당이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은 그들의 선교 전략을 따라 안식일에 회당을 찾습니다.

    2절에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갔다.’는 것은 안식일 회당 예배에 참석하여 자연스럽게 그 순서 가운데에 ‘순회 랍비’들에게 말씀에 대하여 설교할 것을 묻는 시간에 말미를 얻어서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는 방식을 말하는 겁니다. 그렇게 말미를 얻은 바울은 그 시간을 놓치지 않고 3절에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 것을 증언하고,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증합니다. 바울은 특히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모두 ’하나님‘께서 행하신 ’신적 사건‘이라는데 강조점을 둡니다.

    이러한 ’회당 전도‘는 2절에 ’세 안식일‘ 즉, 3주에 걸쳐서 진행이 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의 탁월한 성경 지식과 해석에 감탄했고, 더욱이 그 메시아가 예수라는 사실에 더욱 놀란 것 같습니다. 그래서 4절에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잖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경건한 헬라인‘은 ’유대교를 동경하지만 할례가 무서워서 유대교에 귀의하지 못하는 이방인‘을 뜻합니다. 이들은 유대교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신비와 유대인들의 도덕적 고결함에 감화되어서 ’유대교인‘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당시 치사율이 70%가 넘는 할례를 받아들이기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안식일마다 회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회당 밖으로 흘러나오는 말씀에 귀기울이는 것으로 위안을 삼던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바울의 설교를 들은 겁니다. 모든 성경의 뜻을 풀이하는데, 그 성경 가운데 가리키는 그리스도가 예수라는 사실, 그리고 그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바울의 가르침이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할례를 받지 않아도,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소식은 ‘경건한 헬라인’들에게 그야말로 복음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바울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바울의 복음 증거는 ‘경건한 헬라인’들에게는 환영을 받지만, 유대인들에게는 반대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반발하고 저항합니다. 그도 당연한 것이 바울 때문에 회당으로 나아와 유대교인이 되고자하는 헬라인들이 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5절에 저자의 불량배들까지 동원하여서 바울이 묵고 있는 ‘야손의 집’을 습격하지만, 바울을 찾지는 못합니다. 원하는 것을 손에 얻지 못하자 그들은 야손과 일부 그리스도인들을 고소합니다.

    이것으로 유대인들의 방해가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은 소동을 피하여 베뢰아로 떠나, 또 그 곳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마음이 부드러운 사람들이어서 복음을 잘 받아 들였다고 11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많았고, 헬라의 귀 부인들이 많이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그 곳까지 유대인들이 추격하여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을 벌여서 결국 바울 일행은 ‘아덴’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바울을 거듭 추격하여 참소하는 유대인들의 주장을 잘 보십시오. ‘바울이 천하를 어지럽게 한다.’고 고소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유대인들의 주장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복음은 틀림없이 세상을 뒤집어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파괴와 분쟁’을 위한 뒤집어엎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샬롬의 세상’으로 재창조하기 위한 해체이고 파괴이고 전복인 셈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복음은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강력합니다. 복음은 그래서 모든 것을 뒤집어엎을 것 같은 위기를 세상 사람들에게 안겨줍니다. 그래서 복음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책잡으려 합니다. 낡은 것이라고 하고, 이 세상에 절대적 진리가 어디 있느냐면서 독선적이라고 깎아 내립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오직 복음으로 모든 세상의 헛된 가치들이 무너져야만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일을 위해 부름 받은 것이 교회의 사명인줄 깨닫고 복음의 진격에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바울의 선교는 많은 유대인들을 자극하였고,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천하를 어지럽히고 예수를 내세워 ‘가이사’, 즉 로마의 황제의 주되심을 부정하고 있다고 고소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복음은 이러한 오해를 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는 삶은 결국 나의 욕심을 충족시키는 ‘내가 주인, 왕’이 되어있는 자리, 즉 ‘자아의 왕좌’에서 스스로 내려와 그 자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만이 하나님의 환영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이 일이 세상에서 무조건 환영받는 일은 되지 않을 수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성도님들 중에서 복음에 헌신되어, 주인을 예수님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삶이 바뀌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장사를 하는데, 예수가 주인이 되니까 주일에 장사할 수 없습니다. 주일에 장사하면 더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지만 결코 ‘돈’이 내 삶의 주인이 되지 않게 하겠다는 결단이 주일 장사를 하지 않게 하는 겁니다. 누구의 강요가 아닌 내 안에 주인이 누구인지 결정이 되면 그 주인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려고 몸부림을 치는 겁니다. ‘직장 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새벽, 수요, 금요기도회 나오시는 것, 참 대단한 헌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분들이 매일 또는 매주 반드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시겠어요. 어떤 날은 야근도 있고, 퇴근하면 집에 가서 쉬어야 또 다음날 일을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내 속에 주인이 바뀐 사람이라면 ‘매주’는 아니어도 자신의 일상의 패턴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맞추려고 애쓰는 노력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내가 그래도 한 달에 한번은 수요, 금요기도회에 가겠다.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월삭기도회는 빠지지 않겠다. 매 주일 새벽기도회는 빠지지 않겠다.” 등의 영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강요가 아닌,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 아닌, 내 안에 주인 되신 예수님이 기뻐하는 그 일을 하고 싶어서 내 본능의 욕구를 꺾어서 복종시키는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기쁨을 누리고 경함하는 것이지요. 복음이 내 삶을 점령할 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바울로 말미암은 복음의 진격이 21세기 대한민국까지 나아와 저와 여러분에게도 미쳐졌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그 복음의 진격이 멈추지 않게 합시다. 복음에 사로잡혀 참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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