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행 20:1-16

◎ 본문: 행 20:1-16
◎ 제목: 언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1. 본문 개요
    a. 행 20:1-6           에베소에서 드로아까지
    b. 행 20:7-16           드로아에서 밀레도까지

2. 관찰
    a. 1-3절: 마게도냐 재방문하는 바울
    b. 4-6절: 마게도냐를 거쳐 드로아에 도착한 바울
    c. 7-12절: 바울의 드로아에서 철야 설교와 청년 유두고
    d. 13-16절: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 여정을 재촉함

3. 적용
    프랑스의 위대한 사상가 폴 사르트르는 ‘인생은 B와 D사이의 C의 연속이다.’라는 말은 남겼습니다. B는 Birth, 탄생을 의미하고, D는 Death, 죽음을 의미하며, C는 Choice, 선택을 말하지요. 그러니까 앞의 문장은 ‘인생은 탄생과 죽음 사이의 선택의 연속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무언가 선택해야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 잘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을 우리는 ‘결정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선택의 연속인 인생 가운데에 결정 장애가 있는 사람은 참 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숨 가쁘게 돌아가고, 순간판단력이 중요한 듯 보입니다. 임기응변의 시대라는 거죠. 그렇다면 그런 시대 가운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기준으로 결정과 선택을 하는 것이 옳을까요? 사도 바울이 선교여행 가운데 가졌던 선택과 결정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데메드리오에 의한 소요가 그치고 바울은 에베소의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계획대로 마게도냐로 떠납니다. 에베소에서의 소요는 그야말로 바울에게 떠날 때를 알려주는 신호였던 셈입니다. 마게도냐에서 바울은 제자들을 든든하게 세운 후, 2절에 ‘헬라’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는 ‘고린도 지역’을 말합니다. 고린도 지역에서 석 달을 머물면서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게 됩니다. 그 후에 배를 타고 수리아로 가려고 할 때에 바울을 해하려고 유대인들이 공모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마게도냐’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여행로를 변경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길이 때로는 순조로울 수도 있고, 때로는 막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순간 순간마다 우리들이 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바울도 그런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2년이라는 시간을 에베소에서 보내고,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는 역사를 마주할 때, 그 곳에서 더 남고 싶은 마음이 많았겠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른 곳으로 보내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소요 사건’으로 알게 되었을 때에 바울은 순종합니다. 수리아로 가는 길이 막힌 것은 바울이 정말 예상치 못한 암초였습니다. 그 순간엔 하나님의 뜻이 이해가 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미련 없이 방향을 바꿉니다. 바울처럼 매 순간의 선택에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충성’ 뿐이고, 하나님의 더 깊은 지혜를 신뢰하면서 막히면 낙담하기보다 돌아가고 물러나고 멈출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절을 보니까 드로아에서 바울을 기다리고 있는 일곱 명의 사람이 언급됩니다. 그들의 이름은 각각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 더베 사람 가이오, 그리고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입니다. 디모데와 에라스도는 먼저 마게도냐로 가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을 마련하고 이 사람들과 함께 드로아에서 바울을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드로아에 도착한 바울은 이레를 머뭅니다.

    사실 바울은 이미 행 19:21에서 로마에 가고자 하는 뜻을 내 비쳤습니다. 그는 지금 곧장 로마로 가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그가 예루살렘을 들를 계획을 세운 이유는 이방 교인들이 예루살렘의 큰 흉년으로 고생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준비한 구제헌금을 전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이 이방인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장으로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평화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행 21장 후반부를 보면 바울은 결국 예루살렘에 방문한 것을 계기로 하여 체포되고 투옥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유대인들의 표적이 되어서 무수한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됩니다. 바울은 이미 비난과 살기가 가득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두려워하거나 망설이지 않습니다.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유히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을 이어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 번 성도님들에게 권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하는 선택은 오직 하나 ‘순종’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일 것입니다. 그 선택들 가운데 우리는 늘 ‘순종’해야 합니다. 무엇에 순종합니까? 하나님의 뜻에 말이지요. 그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순종이 때로는 우리에게 손해를 끼칠 수도 있고, 위협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우리는 두렴 없이 그 길을 선택해야 함이 옳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평소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태도입니다. 평안하고 어떤 불편함이 없을 때에도 끊임없이 구해야 합니다. 후에 혹 나에게 불편함이 찾아오고, 나를 힘들게 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선택’을 해야 할 때에 뒤로 물러남 없이 그 선택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기도의 자리마다 그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칠 일을 머무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말씀을 전합니다. 떠나기 전날 밤중까지도 강론은 이어졌습니다. 도중에 두기고라는 청년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난리 아닌 난리가 이어졌어도 바울은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다가 새벽에 떠납니다. 그가 이렇게 거듭 강론에 목숨을 걸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금 이들과 만나 교제하는 것이 마지막일 것임을 짐작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큰 시련이 자신을 기다릴 줄 알았기 때문에 미처 다시는 못볼 사람처럼 한 말씀이라도 더 전하고 더 들으려고 했던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바울의 모습과 바울의 말씀을 듣는 이들의 모습 속에서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말씀을 묵상하고 배울 기회가 항상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더 확장해서 말씀드려 본다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과 직분을 지금 나에게 맡기신다고 믿어질 때에는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는 겁니다. 또 다시 다른 기회가 나에게 올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라는 겁니다. 그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내 앞에 주어진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는 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야 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말고 마지막 기회로 여기며 붙잡아야 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새벽기도회 시간이니까 내일도 새벽기도회는 있을 것이다. 매주 반복되는 수요, 금요기도회니까 다음 주에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매 주일 공예배, 주일마다 돌아오는 것이니 다음 주에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런 마음의 자세는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다는 겁니다. 매 예배의 자리가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추구함이 우리에게 요구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담임목사로 부임하고 거듭 성도님들에게 ‘양육’에 대한 중요성을 말씀드립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다음 학기에, 내년에, 내 후년에도 양육 과정은 계속 있을 거니까 다음에도 기회가 있겠지?’ 그러면서 미루시면 안 됩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졌을 때에 순종해야 합니다.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야 빼앗기지 않습니다. 즉시 순종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사용하시고, 그 사람에게 복 주십니다. 언제든지, 어떤 상황에든지 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택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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