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행 21:1-16
◎ 제목: 증인의 사명
1. 본문 개요
a. 행 21:1-6 밀레도에서 두로까지
b. 행 21:7-14 가이사랴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2. 관찰
a. 1-3절: 마지막 항해 일지
b. 4-6절: 두로의 제자들과 재회 및 작별
c. 7-9절: 가이사랴 빌립의 집 방문
d. 10-14절: 아바보의 예언과 바울의 응답
e. 15-16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바울
3. 적용
‘위증’이라는 죄목이 있습니다. 법정에 증인으로 선 사람이 거짓 증언을 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증인은 자기 자신에게 혹은 제 3자에게 손해가 되고 고난이 있더라도 반드시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성도를 증인이라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전해야 할 것을 반드시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헬라어로 ‘증인’이라는 단어 ‘마르투스’는 ‘순교자’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증인으로서 성도에게는 목숨보다 중요한 진리를 전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라는 도시에서 선교의 ‘큰 문’이 열려서 3년 동안 복음의 진보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에는 그 간 만났던 사랑이 깊어진 공동체가 있었지요. 하지만 그들과 눈물의 작별을 고하고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향했습니다. 유럽을 돌아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 가운데 다시 에베소 근처인 ‘밀레도’에 도착한 바울은 ‘에베소’로 가지는 않고, 그 곳의 장로들을 청하여서 다시 설교를 통해 그들에게 당부할 것들을 당부합니다. 그 내용이 20:17-38까지의 내용입니다.
설교를 통해 에베소 장로들과 교제한 바울은 다시 배를 타고 소스, 로도를 지나 바다라에서 ‘두로’로 가기 위해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로 갈아탑니다. 바다라에서 갈아 탄 배는 대형 상선이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두로까지 약 640km의 먼 거리를 지중해를 관통해야 했기에 거센 바람을 견디기 위해서는 클 배가 아니고서는 항해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바다라를 출발한 배는 무사히 두로 항에 정박합니다. 짐을 내린 바울 일행은 두로에서 일주일을 머무는데, 도착하자마자 제자들을 찾아 재회의 기쁨을 나눕니다.
두로에서의 제자들과 바울 일행과의 만남은 참으로 애틋했을 겁니다. 바울이 행 15장에서 ‘예루살렘 공회의’에서 나눈 이방인 성도들에 대한 지침을 가지고 육로로 안디옥에 올라갈 때에 두로를 지나갔습니다. 그 때 사도들의 결정을 바울을 통해 듣고는 기뻐했던 지체들이 바로 두로의 제자들입니다. 비록 항상 만날 수 없고 떨어져 있더라도 그들은 언제나 바울의 영적 자녀이자 동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늘 서로의 안부를 걱정하고 위하여 기도해 주는 관계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 공동체 속의 성도들의 모습이 오늘 바울과 두로의 제자들과 같은 모습이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1년 365일을 계속해서 붙어 지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한 아버지로 섬기는 가족이자 지체입니다. 매주 주일이 되어서나 한 번 만나는 사이일지는 모르지만, 그 것이 우리의 관계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참으로 하나 됨을 경험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일입니다. 말 뿐이 아니라 우리는 실제로 서로 기도하는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 주일, 또는 주중에 날을 정해서 구역 모임으로 모입니다. 제가 구역모임에서 강조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모임 후에 서로를 위해 뜨겁게 통성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이때에 서로의 기도제목을 적극적으로 나누어야 합니다. 혹 다른 사람이 알기에 창피한 기도제목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구역 안에서는 적극적으로 그 기도제목을 나누어 가지고,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응답의 역사가 일어나면 소그룹은 더욱 하나가 되고, 교회 공동체는 점점 ‘가족’임을 깨닫고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놀라운 역사가 전대중앙교회 곳곳에서 일어나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본문 4절을 보니까 기쁨도 잠시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 것을 권합니다. 그리고 11절에서는 두로를 떠나 ‘가이사랴’의 전도자 빌립의 집에 머물 때에, ‘아가보’라는 한 선지자가 찾아와서는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신의 수족을 잡아매고는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고 예언을 하기까지 합니다. 방문하는 곳마다 성령에 감동된 자들이 예루살렘 행을 만류합니다. 더군다나 ‘성령의 감동’으로 전달되는 메시지이지 않습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전달되는데, 그렇다면 이는 바울 입장에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는 사인이 아닌지 고민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이미 ‘각 성’에 이를 때마다 성령께서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고난당할 것에 대해 보여주셨기 때문에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령에 감동된 지체들을 통해 예루살렘 고난에 대한 예언이 주어지는 것은 ‘마음의 준비’를 위한 것이지 결코 ‘회피’를 위한 것이 아님을 또한 바울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것에 대해 늘 순탄한 길만 보장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오히려 참 믿음은 고난 없는 삶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주의 뜻을 이루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그런 기도하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 고난을 피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마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혹 지금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님들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 고난을 통해 이루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주님은 보여주시고, 힘들어도 그 모든 과정을 감당할 용기와 능력을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을 자신을 향한 염려에 감사하면서도 그들의 바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바람에 따라서만 움직입니다. 한 치의 주저함이나 흔들림 없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화해시키고, 새 이스라엘 공동체를 만들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전파하는 사명이 자신에게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라면, 환난과 결박뿐 아니라 죽음까지도 각오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명’은 단순히 저와 같은 ‘목회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누구든지 ‘사명’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언제나 ‘사명지향적 삶’입니다. 이 말은 성도라 불리는 모든 이들은 저마다 분량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각자 자신의 삶을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할 ‘소명’이 있다는 겁니다. 저처럼 목사로서 복음 설교를 통해 목양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도 있고, 각자 자시의 생업을 통해 다른 이들을 섬겨야 하는 사명도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전도의 사명, 복음 증거의 사명’은 피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어느 누구도 증인의 사명에서 소외될 자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하기에 ‘전도’를 위해 혹 내가 ‘희생’하고 있는 자리가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켜 볼 때에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위해 한 번도 손해를 본 적이 없는 삶을 살았다면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 내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 있는지 말입니다. 단 한번도 ‘복음을 위해 내가 희생되거나 손해를 보더라도 상관없다.’는 마음을 먹어본 적이 없다면, 내가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 맞는지, 성도라 불리는 것이 합당한지를 되돌아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새벽에 나의 삶을 다시 ‘증인의 사명’의 자리에 세우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복음을 위해 손해 보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기도를 들으시고 매 순간 ‘증인의 사명’에 나를 사용하실 주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