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강도사 / 행 21:17-36

◎본문: 행 21:17-36

◎개요

17-26절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27-36절 예루살렘 소동과 바울의 체포

◎본문연구

오늘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 은혜가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 말씀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7절부터 26절까지는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에 대한 내용이고, 27절부터 36절까지는 예루살렘 소동과 바울의 체포에 대한 내용의 말씀입니다.

바울의 다섯 번째 예루살렘 방문입니다. 예루살렘 형제들이 따뜻하게 맞이해줍니다. 첫날은 나손의 집에서 여장을 풀었습니다. 이튿날 바울은 그동안 여정에 함께한 동료들을 이끌고 예루살렘 교회 대표격인 야고보와 장로들을 만납니다. 이 장면은 유대 교회와 이방 교회, 두 지평의 선교적 융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후, 거의 4년 만의 만남이니 무척 반가웠을 것입니다. 따뜻한 환대를 받은 후 곧장 하나님께서 지금껏 자신을 통해 이방에 행하신 위대한 구원 사역을 낱낱이 들려줍니다. 그 명백한 증거가 지금 곁에 서 있는 일곱 명, 사도행전 20장 4절에 나오는 소바더와 아리스다고, 세군도와 가이오와 디모데와 두기고와 드로비모, 이 일곱명의 대표단이며, 이들이 가져온 풍성한 연보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값없이 복음을 나누어 주었고, 이방교회는 물질을 나눕니다.

바울이 지난 4년간 소아시아와 마게도냐, 아가야에서 있었던 선교적 상황을 상세히 들려줍니다. 예루살렘 형제들이 듣고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죠.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 유대교회와 이방교회가 하나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형제들이 한 가지 민감한 상황을 바울에게 알립니다. 다른 유대 형제들이 바울에게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초기부터 수많은 유대인이 복음에 돌아오는 역동적 사역을 맛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핍박이 예루살렘 내 복음의 진전을 방해했지만 복음을 믿는 유대인들은 계속 늘어갔습니다. 형제들은 그 수를 수만 명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들 모두 율법에 열심인 자들이었습니다. 문제는 바울이 이방 사역 중 회당을 찾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율법과 전통을 무효화하는 태도가 예루살렘 유대 형제들에게 전해졌고, 이것 때문에 바울을 매우 불편하게 여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으로 모세의 율법, 할례, 관습을 지적했는데, 전부 유대 형제들이 열심을 쏟는 주제들이죠. 원문을 보면 바울이 가르친 것을 모세에 대한 배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정의한 것은 바울이 유대 아이들에게 할례를 금하고 유대 관습에 따라 살지 말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열심인 유대 형제들도 분노할 수밖에 없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사실상 과거 사도회의에서 결정된 사항과는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바울이 모세 율법, 할례와 관습의 불필요성을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을 상대로 가르쳤다는게 문제입니다. 이는 그들이 바울을 율법 폐기론자로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인 것이죠. 야고보와 형제들은 유대 형제들도 바울의 방문 소식을 알고 있기에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바울에게 한 가지를 제안하고 그것을 따라줄 것을 정중히 부탁합니다.

바울이 율법은 존중하고 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죠. 마침 예루살렘 교회 안에 서원한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서원은 나실인 법에 따라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의미로 해당 율법에 따라 절차대로 진행합니다. 형제들은 바울에게 네 사람을 데려가 정결예식을 행하고 그들의 머리 깎는 비용을 대신 지불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보여준다면 유대 형제들이 율법을 존중하는 바울을 보고 오해를 풀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것입니다. 야고보를 위시한 형제들은 자칫 이 문제가 바울과 동료들의 심기를 건드려 괜한 갈등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유대 성도들을 달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퍼포먼스를 요구한 것으로 들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이런 요구가 사도회의 결정을 무위로 돌리는 것은 아님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결정문의 내용을 다시 한번 환기해줍니다.

바울은 놀랍게도 전혀 불편한 내색없이 이 요청을 수락합니다. 물론 바울이 율법 전체를 부정한다든지 무가치해졌다고 가르친 적은 없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존중할 뿐 아니라 예수 안에 완성된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오해와 갈등 상황에서 바울이 최우선으로 고민한 것은 바로 예루살렘 교회의 덕입니다. 이 요청에 응한다고 복음을 훼손한다거나 타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형제들의 제안을 적극 이행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여태 보여왔던 상황에 따른 복음적 유연성이죠. 복음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조건에서 복음을 얼마든지 유연하게 표현해온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편지에서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다고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이튿날 바울은 서원한 네 형제를 데리고 정결예식을 행한 후 성전에 들어가 제사를 마치기까지 일주일을 기다렸다가 결례 기간 만기를 신고합니다. 형제들의 요구에 따라 성전에 들어가 일주일을 보낸 바울은 예상치 못한 사람들 때문에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소아시아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때마침 성전을 방문 중이었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단박에 알아보며 또 다시 무리를 충동합니다. 바울을 붙잡고 성전 안에 있던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두 가지 내용으로 선동하며 고발합니다.

먼저 바울이 이방 지역에서 가는 곳마다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비방했다고 주장합니다. 유대인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들을 비방했으며, 유대교의 두 기둥인 율법과 성전까지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인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들을 비방했으며, 유대교의 두 기둥인 율법과 성전까지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그들의 주장을 목격자의 증언으로 신뢰했을 것입니다. 두 번째 고발 내용은 황당합니다. 무엇이냐, 바울이 이방인을 무단으로 성전에 들여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추측성 모함이죠. 그 이유가 곧바로 소개됩니다. 고발자들이 얼마 전 바울이 에베소 출신 이방인 드로비모와 시내에 함께 있던 모습을 목격했는데 바울이 지금 그를 데리고 성전까지 와 있을 것이라고 섣불리 짐작한 것입니다. 첫 번째는 바울에게 변론을 들어볼 여지가 있었고 두 번째는 그럴 필요도 없는 가짜 뉴스였지만 심각한 사안이었습니다. 거룩한 곳은 성소가 아니라,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 모두를 포함하는 영역을 지칭합니다. 이 밖에 이방인의 뜰입니다. 이방인 드로비모가 구별된 곳에 들어왔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일이 되는 것이죠.

당시 이방인의 뜰과 거룩한 뜰 경계에 이방인들이 볼 수 있게 경고문이 새겨진 표지석이 있었습니다. 이 고소를 들은 유대인들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모두 의기투합해서 바울을 붙잡고 성전 밖으로 끌고가 죽이려고 합니다. 소요는 확산되었고,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천부장이 부하를 이끌고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출두합니다. 그만큼 사태가 심각했죠. 천부장은 소요 원인으로 지목된 바울을 무리와 분리 조치하기 위해 관할 영내로 연행하라고 명하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시고 죽으심으로 무너뜨린 유대인 뜰과 이방인 뜰 사이에 있는 담을, 유대인들은 무너지기 이전 상태 그대로 그들의 마음에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음이 닫혀 있는 것이죠. 마음의 담이 허물어지지 않은 상태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어떠합니까? 그러한 편견이나 차별, 혹은 배척의 담이 다 허물어져 있습니까? 그 누구라도 진정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그들을 용납하고 받아주실 수 있습니까? 그 사람이 원수일지라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용납하셨습니다. 사랑하셔서 자신의 생명과 피를 내어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큰 사랑에 이르기까지 성장하여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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