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강도사 / 행 21:37-22:11

◎본문: 행 21:37-22:11

◎개요

21:37-22:2 발언권과 변론의 기회를 얻은 바울

22:3-11 바울의 첫 변론

◎본문연구

오늘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 은혜가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37절부터 22장 2절까지는 발언권과 변론의 기회를 얻은 바울에 대한 내용이고, 22장 3절부터 11절까지는 바울의 첫 변론에 대한 내용입니다.

바울은 천부장의 개입으로 성난 무리에서 분리됩니다. 역설적으로 로마 군인들의 비호를 받으며 그는 가장 안전한 장소로 끌려갑니다. 무리의 집단 린치로 몸조차 가누지 못했던 바울은 끌려가는 그 찰나에도 기회를 붙잡고자 시도합니다. 로마군 관할 구역 내로 들어가기 전, 쇠사슬에 묶인 채로 군인들의 손에 들려 계단을 올라갈 때, 바울이 천부장에게 한마디를 건넵니다.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라고 묻죠. 천부장이 바울의 수려한 헬라어 구사에 놀랍니다. 지배국 언어에 서툰 피지배국 사람으로 생각했던 천부장은 곧 바울에게 호기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즉시 바울에게 질문하죠. 대뜸 몇해 전 군사 반란을 일으킨 그 애굽인이냐고 묻습니다. 대략 3년 전에 일어난 일로 추정하는데, 현 총독 벨릭스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면, 한 애굽인이 자객들을 모아 예루살렘을 무너뜨리려 약 3만 명이 진군했는데, 이 애굽인의 모반은 예루살렘 이르기 전, 감람산 인근에서 수포로 돌아갑니다.

로마는 애굽인 포획에 실패합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그 애굽인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 호기심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누구인지 밝힐 기회를 얻게 되죠. 바울은 자신은 그 애굽인이 아니라 유대인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복음으로 성에 소동을 일으켰고 또 그 복음으로 세상을 전복한다는 차원에서 애굽인과 닮았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 표현이 천부장을 또 한 번 놀라게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길리기아 다소 시민이라고 소개하는데, 의도적으로 다소에 강조점을 두려고 소읍이 아닌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로마 여느 도시에 비해 다소만의 우월함을 강조하며 이목을 끌고 있는 것입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다소의 시민이라는 말에 놀랐지만, 잠시 후 로마 시민권자라는 말에 더욱 놀랍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바울의 정체성에 의아해합니다. 바울은 천부장에게 동족 유대인들 앞에서 잠시 발언 기회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는 일체 고민없이 허락합니다. 성전에서 별안간에 붙잡혀 폭력을 당하고 로마인의 손에 끌려가던 바울이 예루살렘 유대인들 앞에서 공식적인 첫 발언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결박하기 위해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청해 예루살렘을 떠났던 바울이 이제 예수님을 위해 결박된 자가 되어 예루살렘 유대인들 앞에서 복음을 선포하게 된 것이죠. 그는 손짓으로 성난 무리의 소음을 매우 조용히 잠재웁니다. 어느새 계단은 설교단이 되었고, 바울은 히브리 말로 설교, 변론을 시작합니다.

바울은 부형들아 라는 말로 자신과 무리의 민족적 친밀성을 강조하며 변론을 시작합니다. 바울은 가장 먼저 지금 그곳에 서서 변론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자세히 공개합니다. 우리가 바울을 이해하는데 열쇠같이 여기는 성경의 핵심 구절이 등장합니다. 당시 한 인물을 정의하는 전형적 틀에 따라서 출생, 성장, 교육, 직업 순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일찍이 다소에 정착해 살았는데, 바울이 어렸을 때 예루살렘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당대 최고 율법학자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되어 율법의 엄격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열심은 그를 예수 공동체를 잔멸하는 일에 헌신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죽이려 달려들었던 무리에게 과거 자신이 보여주었던 엄청난 열심을 소개합니다. 무리에게 이 도는 바울이 붙잡혀 있는 도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입장에서는 유대 백성과 율법과 성전을 비방하는 이단 사상입니다. 전에 바울도 이 도를 따르던 사람들을 박해하며 죽이는 일에 앞장섰으며, 그들을 결박해 옥에 넘기는 일을 사명으로 알고 헌신했습니다. 그것은 유대 최고 종교권력자들인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증언해줄 수 있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열심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도를 따르는 다메섹 잔당들을 잡아 끌고 오기 위해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다메섹 형제들에게 보낼 공문까지 받았었죠. 바울은 이 도에 대해 누구보다 적대적이었고, 그것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누구보다 살기등등한 공포의 추격자였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을 위한 자신의 소명으로 확신했기에 그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변증의 서론에서 바울은 유대교에 대해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자신의 열심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저주하던 이 도에 어떻게 자신이 정반대로 목숨을 걸게 되었는지 그 대반전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는 율법의 열심히 이 도를 거스르는 청중을 반전의 현장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합니다. 정오쯤 다메섹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태양빛이 가장 강렬하게 비치는 그 시간, 그보다 강한 또 다른 빛이 바울을 두르자 그 자리에 고꾸라지고 맙니다. 그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음성을 듣죠. 그 음성에 놀란 바울이 주님 누구시니이까 라고 물었고,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는 응답을 듣습니다.

그렇게 바울이 부활의 예수님을 만납니다. 바울은 분명 예수님 믿는 자들을 박해했는데, 예수님은 그 박해를 자신이 당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바울과 함께한 사람들은 빛은 보았지만 소리는 듣지 못합니다. 곧바로 바울이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되묻습니다.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면 그가 무엇을 해야할지 누군가 전부 알려줄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 빛의 광채로 인해 일시적으로 실명합니다. 주변 일행이 그를 부축해 끌고 다메섹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가던 바울이 예수님께 붙잡힌 것이죠. 이제부터 바울의 생애는 예수님의 손에 끌려가는 수동적 생애가 되는 것이죠. 바울은 그렇게 지금 이 자리, 지금도 로마 군인들의 손에 끌려가지만, 사실 예수님의 손에, 성령에 끌려가고 있는 이 자리까지 온 것이죠.

예수님의 성도라면, 누구에게든 간증거리가 많겠죠. 하지만 그 간증거리를 주신 성령의 손에 지금 이끌리고 있는지, 그래서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또 하나의 간증거리를 만들어가고 있는지, 거기에 순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죠. 사도 바울이 자신의 바뀐 인생을 이야기하며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을 메시야, 구원자로 믿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죠.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항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가 전하고 행동하는 모든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것이 성령에 이끌려 가는 사람의 특징이죠.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까. 성령에 이끌림 받아 항상 예수님을 우리의 삶에서 나타내고 증거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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