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행 22:30-23:11

◎ 본문: 행 22:30-23:11
◎ 제목: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1. 본문 개요
    a. 행 22:30-23:5 산헤드린 공회 소집과 바울과 공회원 간의 논쟁
b. 행 23:6-1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간의 논쟁으로 구출되는 바울

2. 관찰
a. 22:30절: 천부장의 산헤드린 공회 소집
b. 23:1-2: 바울의 진술과 대제사장의 분노
c. 23:3-5: 대제사장을 향한 바울의 분노와 잘못을 인정
d. 23:6-10: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의 논쟁 촉발로 위기를 모면하는 바울
e. 23:11: 환상 중에 나타난 주님의 위로

3. 적용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들은 천부장은 다음 날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바울을 고발하는지 알고자 ‘공회’를 소집합니다. 여기에서 공회는 ‘산헤드린 공회’를 말합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두개인을 중심으로 한 ‘대제사장’과 ‘제사장 귀족들’ 그리고 바리새파의 몇몇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공회의 권한은 모든 유대인의 영적, 정치적, 법적 문제에 까지 미쳤습니다. 천부장이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한 이유는 현재 바울로 인한 소요의 근본 문제가 다분히 유대교 내부의 종교적 다툼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얼른 안정을 꾀한 후에 발을 빼려는 시도였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정치적 문제로 확대될 가능성이 비쳐지면 적극적으로 개입할 생각도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 시민임을 알고는 결박하지 않고 공회에 세웁니다. 그리고 23:1에 바울은 공회를 주목하여 변론하기 시작합니다. 지금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 종교재판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바울의 23장부터의 변론은 ‘재판 형식의 변론’입니다. 1절에 ‘주목했다.’는 표현은 ‘사물 또는 사람을 지속적이고 강렬하게 응시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바울이 종교지도자들의 살기등등한 시선 가운데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담대히 그들을 바라보았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오늘까지 양심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을 섬겨왔음을 고백합니다.

바울의 진술은 공회원들의 입장에서 탐탁지 않았을 뿐더러 도리어 그들의 분노를 자극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 앞에 한 점 부끄러움 없다면, 그를 고발한 종교지도자들은 어찌 되겠습니까? 공회원들은 바울이 의로움을 내새워 자신들의 불의함을 들추고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지금 그들은 바울이 신성모독의 발언과 행동을 했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의 진술을 더 들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바울은 배교자이며, 유대교를 교란케 하는 변종 이단아일 뿐입니다. 그래서 산헤드린 공회의 수장인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합니다.

아나니아의 명령에 바울은 그를 향하여 3절에 ‘회칠한 담이여’라고 저주합니다. 매우 과격한 대응으로 비춰집니다.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라고 이어 말한 것은 율법이 말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즉 ‘동해보복적 선언’에 해당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율법에 합당한 죄를 선고하지도 않고 권력에 의지하여 폭력으로 율법을 범했다고, 도리어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정죄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강경한 태도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바울을 향해 ‘네가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욕하느냐?’라고 호통을 치지요. ‘하나님의 대제사장’은 ‘하나님이 택하신 대제사장’이라는 의미입니다.

출 22:28을 보시면 율법은 대제사장을 저주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을 들은 바울은 곧바로 그가 대제사장인 줄 몰랐다고 말하면서 출 28:28에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회심 이후, 이번 예루살렘 방문이 겨우 다섯 번째이기 때문에 실제로 아나니아가 대제사장인 줄 몰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바울이 안질로 인하여 시력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을 잘 분간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잘못을 인정한 것이 도리어 바울로 하여금 ‘심문의 주도권’을 가져오는 계기가 됩니다.

바울은 6절에 적절한 성경 인용으로 주변이 어수선해 진 틈을 타, 공회의 일부가 ‘바리새인’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는 ‘자신은 바리새인으로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 받는 것이’라고 외칩니다. 이 말로 인해 공회 안에 있는 ‘소수파’인 바리새인들을 결집하게 됩니다. 8절에 언급된 바,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두개인들은 부활, 천사, 영 등을 인정하지 않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이지만 바리새인들은 모든 영적 신비를 다 인정합니다. 그런데 지금 심문받는 이가 바리새인이라고 하니 소수파인 바리새파 입장에서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하겠느냐?’라고 외치며 바울의 역성을 들기 시작한 겁니다.

결국 10절에 두 세력이 싸우는 틈바구니 속에서 위험 상황에 빠져 바울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을 염려한 천부장은 그 즉시 개입하여 바울을 무리들로부터 분리해 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인 23:11에, 다시 로마 군 영내로 돌아오고 그날 밤 환상에 사로잡힙니다. 환상 중에 ‘주님’, 곧 예수님께서 바울을 향하여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라고 바울을 독려하며 위로하십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큰 평안이 바울을 감싸 안았을 겁니다. 비록 영내에 죄수의 몸이었지만 말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매우 압박받을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외칩니다. 이 바울의 담대함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 부끄럽지 않은 신앙 양심에서 나왔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 일에 자신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일,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통해 행하신 일을 증거 할 기회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양심껏 섬겨온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심을 믿었으며, 환난이 있으리라 미리 말씀해 주신 성령께서도 돕고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 또한 있었습니다. 그러하기에 바울은 공회를 향해 당당하게 바라보고 진리를 선포하며 외식과 헛된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종교권력자의 의표를 찌르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회 안에 서로 대립되는 두 진영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자신이 그간 부활의 소망에 관해 말하다가 잡혀 왔다고 증언합니다. 그로 인해 두 진영의 싸움이 벌어졌고, 그 사이에 바울은 무사히 영내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복음도 전하고, 동시에 환난에서 건짐도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할 말을 바울에게 주셨을 뿐만 아니라 돕는 이들도 보내주시고 순간적인 기지도 주셔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대적자들끼리 싸우게 하셔서 자기 종을 구해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바울과 같은 길을 걸어가야 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길을 걸어가다 보면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분명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여 눈앞이 막막한 것과 같은 상황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는 성도들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분명하게 만나게 되는 어려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매 순간 ‘목자’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목자’되신 하나님께서 분명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과 함께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과 형편 속에서도 바울과 같이 담대할 수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살길이 보이고, 절벽과 낭떠러지에서도 바위틈의 백합화를 만나게 됩니다.

이 새벽에 환경을 초월하신 분과 함께 있을 때에 모든 불안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음을 깨닫고,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를 때 고난 속에서도 불안을 밀어내는 평안, 어둠을 밀어내는 빛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늘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든든히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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