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행 24:24-25:12


◎ 본문: 행 24:24-25:12
◎ 제목: 가둘 수 없는 복음

1. 본문 개요
    a. 행 24:24-27           벨릭스와 바울
    b. 행 25:1-12           새 총독 베스도와 유대인의 고발로 재기되는 재판

2. 관찰
    a. 24-27절: 바울의 무고함을 알면서도 2년을 묶어두는 벨릭스
    b. 1-5절: 새 총독 베스도가 유대인들의 고발에도 원칙을 지킴
    c. 6-8절: 유대인들의 고발과 바울의 변론
    d. 9-12절: 가이사에게 상소하는 바울

3. 적용
    바울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선교에 헌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선교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 왕 되신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간계와 권력으로 그 일을 막으려 할지라도, 독생자 까지도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다는 결말을 바울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왕 되신 하나님의 의지와 갈망을 알기 때문에 바울은 망설이지도, 서성이지도 않고 진실하게 복음으로 매 순간을 맞딱뜨리고 상대합니다.

    바울을 죽이겠다고 수십의 유대인들이 금식하며 버티고 있는 상황을 접했던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유대 총독 ‘벨릭스’에게 편지를 보내, 바울을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로마 사람’으로 묘사하며 그를 보내고, 더불어 바울을 고발하는 사람도 총독에게 이관할 것을 보고합니다. 그리고 천부장은 바울을 가이사랴로 압송하지요.

    바울이 가이사랴로 간지 닷세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변호사 ‘더둘로’와 장로들과 함께 가이사랴로 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합니다. 그리고 24:2-21에 걸쳐 벨릭스의 재판이 이어집니다. 고발한 대제사장의 발언 후에, 바울이 피고로서 변론을 하자 벨릭스는 22절에 바울이 말하는 ‘예수의 복음’, 이 도에 대해 더 자세하게 알기에 재판을 연기하고 바울에게는 ‘연금 상태’로 자유를 주고 지인들과 교류하도록 허락을 합니다.

    오늘 본문 24:24절에 이 일이 있은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의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바울을 부릅니다. 이런 일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그리고 뜻 밖에도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들려준 것은 예수를 믿는 믿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바울은 그 믿음의 내용을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압축해서 강론합니다. ‘장차 오는 심판’은 유대인인 드루실라의 관심을 사로잡았을 것이고, 벨릭스는 복음을 듣고 두려움으로 반응합니다. 그리고 바울을 돌려 보내면서 틈나는 대로 부르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벨릭스는 더 자주 불러서 이른바 ‘쪽복음’이라 말할 수 잇는 것을 지속적으로 들었습니다.

    여기에서 벨릭스이 긍정적인 모습도 보이지만, 부정적인 모습도 이어서 묘사됩니다. 그는 바울의 복음을 들으면서 동시에 뇌물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앞선 재판 중에 바울이 자신의 민족을 구제하기 위해 구제할 것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들어왔다는 진술 때문에 벨릭스는 바울을 막대한 자금력을 가진 거부나 귀인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복음보다 돈을 바라는 벨릭스를 향히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을 전했습니다. 벨릭스의 호의를 얻기 위해 듣기 좋은 말을 전하기보다 그를 살리기 위해 불편하고 두려운 말을 전했습니다. 앞선 재판에서 대제사장 편의 변호사였던 ‘더둘로’는 벨릭스의 통치로 태평을 누리고 여러 가지로 개선이 되었다는 아첨의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탐욕과 불륜과 잔인함으로 널리 알려진 벨릭스에게 의외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전함으로 그의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도는 단순히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만 얻는 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정의롭고 거룩한 사랑의 통치에 복종하는 공의로운 복음입니다. 때문에 세상이 염치와 수치를 모르고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곳으로 변해가고 있다면,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그저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 간다는 은혜만을 남발할 것이 아니라 분명 주의 도를 따르지 않는 자에게 미치는 심판에 대해 선포해야 합니다. 그것이 당장은 교회가 외면당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 그 바른 도를 전하는 교회가 세상 가운데에서 존경을 받고 믿는 자가 더하게 된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벨릭스는 바울이 무죄하다는 것을 여러 번의 접견을 통해 알고 있었음에도 유대인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바울을 향해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본문 24:27에 나타난 것처럼 구금한지 2년의 세월이 지나고 벨릭스는 자신의 후임 베스도로 총독이 바뀔 때까지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는 임지를 옮겨버립니다. 더군다나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바울을 향한 유대인들의 살의는 좀처럼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베스도가 새로 부임하자 또다시 살해 음모를 꾸밉니다. 하지만 베스도의 원칙적인 행정으로 유대인들의 음모는 좌초됩니다.

    벨릭스의 탐욕과 무책임한 보신주의 행정이 바울을 2년이나 구금 상태에 머물게 했지만, 그래도 그것이 바울의 생명을 보존케 했습니다. 바뀐 베스도를 통해 2년 동안 키워왔던 바울 살해의 계획을 실현하려 하였지만, 베스도의 원칙주의가 또 바울을 살립니다. 하나님 뿐 아니라 사탄도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계속 우는 사자와 같이 바울을 삼키려 하지만, 하나님은 결국에는 바울을 지켜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권력을 통해서도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사탄의 집요한 공격 속에서도 우리는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늘 하나님을 향하여 신실할 때, 하나님 또한 우리를 향한 신실함을 거두지 않으실 겁니다.

    베스도는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올려서 재판 받게 해 달라는 유대인들의 요구를 ‘바울이 구류된 곳이 가이사랴이기 때문에 재판은 가이사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워서 바울을 내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베스도도 결국 유대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바울을 불러서는 예루살렘에서 재판받기를 제안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로마의 가이사에게 상소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울의 목표가 ‘출옥’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유의 몸이든 죄수의 신분이든 상관없이 복음을 로마에서도 전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만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빨리 석방될 수 있는 길을 놔두고 가이사에게 재판 받기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결정이 결국 바울을 살리는 결정이 되지 않았습니까? 2년이 지나도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겠다는 결심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재판 받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유리하고 빨리 결정이 나서 자유의 몸이 되는데 유익이 될지는 모르지만, 결국 그 길은 죽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하지만 가이사에게 상소하여 로마까지 죄수의 신분으로 가는 것은 돌아가는 것 같고, 계속 죄수의 신분이어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지만, 그것이 결국 바울을 살리는 길이었음을 우리는 봅니다.

    이 새벽에 나의 삶에서 내가 결정하는 모든 것들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무엇으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든, 찬양의 가사를 통해 마음을 주셨든, 마음속에 세미한 음성으로 들려 주셨든 간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그 무엇’으로 결정하고 선택하려 합니까? 아니면 나에게 그 때 그 때 주어지는 상황과 환경에 따라 이리 저리 결정과 선택을 바꾸고 있습니까? 바울은 오직 ‘복음’ 만이 결정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으로 인해 갇혀 있는 듯 보였지만 그 무엇도 바울을 가둘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그러하기를 원합니다. 순간순간 변하는 상황에 따라 판단하면 자유로울 것 같지만, 결국 그것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늘 ‘복음’이 나의 삶의 기준이 되게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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