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강도사 / 행 26:1-18

◎본문: 행 26:1-18

◎개요

1-3절 아그립바를 향한 찬사

4-8절 이스라엘이 소망하던 부활

9-12절 예수를 박해했던 과거

13-18절 다메섹 경험

◎본문연구

오늘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 은혜가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울의 변론에 관한 말씀인데, 4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부터 3절까지는 아그립바를 향한 찬사에 대한 내용이고, 4절부터 8절까지는 이스라엘이 소망하던 부활에 관한 내용, 9절부터 12절까지는 예수를 박해했던 과거에 대한 내용, 13절부터 18절까지는 다메섹 경험에 대한 내용입니다.

아그립바가 심문을 주도합니다. 총독 벨릭스는 제스처로 허락했지만 아그립바는 직접 말로 바울의 변론을 허락합니다. 이에 바울은 아그립바 왕을 부르며 그를 향한 찬사로 변론을 시작합니다. 이 찬사는 사탕발림과는 다릅니다. 바울의 찬사 목적은 아그립바의 호의가 아니라 그를 위한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형식은 변론이지만 내용은 복음입니다. 바울은 먼저 유대인들의 고발에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론할 수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아그립바와 주변 귀인들은 그 다행을 운좋게 선처받을 기회로 여겼겠지만, 바울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음 전할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죠. 이것은 바울에게 다행이 아니라 아그립바에게 복된 일입니다.

두 번째 찬사는 특별히 아그립바가 친유대적 정서를 가지고 있어 모든 유대 풍속과 문제를 잘 알고 있다는 점에 맞춰집니다. 고발당한 것이 율법과 성전 등의 유대적 사안이라 자신의 무고 입증에 유리해서 던진 말이 아닙니다. 그 유대적 배경이 복음의 변증을 이해하는 데 밝은 빛을 제공해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너그럽게 경청해주기를 요청하며 찬사를 마무리합니다. 바울은 주눅 들지 않고 복음 전할 기회를 담대히 붙들죠.

바울은 예루살렘에 몸 담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변론을 시작합니다. 바울은 어렸을 때부터 유대교의 심장부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그 시절을 예루살렘 유대인들이 익히 잘 알고 있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그가 얼마나 예루살렘과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자랐는지 강조한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어디에 속하여 어떻게 율법 교육을 받았는지 진술합니다. 당대 덕망 있는 지도자 랍비 가말리엘 문하생이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지만, 유대교 내에서 가장 엄격한 종파인 바리새파에서 율법을 배우고 율법적 삶을 실천해왔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자신의 성장과 교육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충분히 증언해줄 수 있다고 말하죠. 지금 이렇게 심문받는 것은 유대교에서 변절해서 또는 이단 사상을 전해서가 아니라, 과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주신 약속을 이루어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결코 유대교와 자신을 단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의 관점에서 연속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민족, 우리 종교, 우리 조상, 우리 열두 지파 등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죠. 그 약속이 무엇입니까? 역사 속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밤낮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토록 간절히 얻기 원했던 것입니다. 자신도 동족으로부터 고소를 당하면서까지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스라엘 조상들과 바울이 기대하는 소망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이루시려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위해 인생들을 구원하시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그 나라를 영원히 통치하시죠.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에서 중요한 것은 또한 영원성입니다. 그 영원한 나라를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영원성의 상징인 부활은 반드시 필요한 개념입니다.

바울은 소망과 부활을 연결합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는 그 백성의 부활을 전제합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의 약속도 소망도 유한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죠. 그러므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실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언약의 첫 단추였던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 안에 씨앗으로 넣어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밤낮으로 섬기며 품었던 소망은 하나님께서 장차 그들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부활 소망이었습니다. 따라서 메시야가 온다면 그는 반드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부활의 약속과 소망이 그로 인해 성취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영원한 생명으로 살리신 그가 바로 메시아입니다. 그러니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바울이 말하는 우리 조상들의 신앙이 아닙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와 유대 고관들에게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을 왜 믿지 못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죽은 자, 그러나 하나님이 죽음에서 살리신 자인 예수님에 대해 꺼냅니다.

바울은 그가 전하는 예수가 바로 그 메시야임을 이야기합니다. 세 번째 바울의 회심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먼저 자신이 예수님을 어떻게 오해했었는지 들려줍니다.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은 유대인들이 부활은 더욱 인정할 수 없었죠. 바울도 과거에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대적하며 열심히 예수님 믿는 자들을 가두고 죽이는 일에 적극 찬동했습니다. 그의 눈에 예수님과 그 추종자들은 신성모독자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위한 열심히 박해에 더욱 열을 올렸고, 대제사장들로부터 합법적인 권한을 부여받아 닥치는 대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잡아 폭력을 휘두르고 예수님을 모독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급기야 대제사장들의 권한이 위임된 공문을 가지고 예수님 믿는 자들을 끌어오려고 다메섹으로 향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 남다른 열심히 지금 자신을 고발하고 죽이려 하는 유대인들의 열심과 일반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간증을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하며 전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생각하고 절대 놓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예수님을 전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에게도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했던, 예수님을 전했던 순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하십니까? 지금도 여전히 최선을 다해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수님을 전하고 계신지요.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보고 주님께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항상 최선을 다해서 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함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주신 능력으로 최선을 다하여 기회를 잡고 예수님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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