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행 26:19-

◎ 본문: 행 26:19-32
◎ 제목: 복음에 미친 사람

1. 본문 개요
    a. 26:19-23           다메섹 회심 이후 지금까지
    b. 25:24-29           아그립바 왕의 권면과 재판 종결, 그리고 로마로의 압송 준비

2. 관찰
    a. 19-21절: 회심 이후 붙잡히기까지의 신앙의 여정
    b. 22-23절: 복음을 증언하는 바울
    c. 24-25절: 학문이 바울을 미치게 한다고 말하는 베스도
    d. 26-29절: 아그립바 왕과 바울의 대화
    e. 30-32절: 재판 종결과 로마 압송 준비

3. 적용
    복음은 모든 것을 뒤집어엎는 메시지입니다.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된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향한 반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은 이 죄 많은 세상이 거절한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었음을 전하는 소식이기 때문에 ‘전복의 메시지’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서는 ‘거절’을 자초하는 일이고, 세상이 주는 모든 특권과 결별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격하게 표현한다면, 복음을 믿고 수용하는 일은 ‘미친 짓’입니다.

    바울은 26장으로 넘어오면서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 중에 가장 큰 권력자와 맞닥뜨립니다. 바로 분봉왕 아그립바입니다. 바울은 26:1-18을 통해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는 도’를 어떻게 핍박하는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다메섹에서 순식간에 예수를 만나 자신의 인생이 180도 바뀌게 되었는지에 대해 변론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19-23절의 내용을 통해 다메섹 사건 이후 어떻게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간략하게 요약합니다. 자신은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거기부터 온 유대와 이방을 돌며 복음을 증언했다고 고백합니다. 마지막 예루살렘에 돌아와 붙잡혔지만 모든 일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지금 그 자리에 서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바울은 19절에 ‘거스르지 않았다.’는 이중 부정의 표현으로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비전’은 너무나도 강력하여 거부할 수 없었음을 표현합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과의 조우는 바울로 하여금 ‘박해의 달음질’을 순식간에 ‘박해 받는 달음질’로 돌이킬 만큼 강력한 운명의 전환이었던 동시에 그 비전에 대단히 적극적으로 순종하려는 의지를 불태우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대상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동족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모두 거침없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한 일이라고는 다메섹, 예루살렘, 유대의 온 땅, 이방인들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요구한 것밖에 없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약속한 것, 즉 그리스도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는 사역에 참여한 것뿐이라고 22-23절에 고백합니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바울을 죽이려 했지만, 주께서 지금까지 도우심으로 살아있음을 바울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의 삶을 통해 우리는 철저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이 자기 삶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바울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율법과 유대교 전통’이 그의 삶의 방향이자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자 바울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모든 삶의 방향과 초점이 맞추어 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세상은 용납지 않고, 바울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바울이 우리에게 묻는 듯합니다.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삶이 불편하냐?’고 말입니다. 그게 정상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 믿고 있는데, 세상의 흐름과 전혀 불편함이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그게 비정상이라는 겁니다. 예수 믿는 것이 내 삶에 무언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예배의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 마음을 때리고, 삶의 방향을 수정하기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느껴지고 있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여 내 삶의 방향이 바뀌고 있느냐고 오늘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묻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권합니다. 예수 때문에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 때문에 삶의 방향이 달라져야 합니다. 믿기 전과 전혀 다를 것 없는 삶이라 여겨지면 오늘 이 새벽에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회개하고 돌이켜서 ‘복음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우리가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그 놀라운 결단이 이 새벽에 저와 여러분에게 펼쳐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베스도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확신에 가득하여 변론하는 바울의 말을 듣고는 ‘그가 미쳤다.’고 말합니다. 24절이지요.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말합니다. 베스도가 바울을 향하여 그렇게 말한 것은 정말 바울이 미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울의 변론 내용이 아그립바 왕을 겨냥한 듯한 분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베스도는 바울의 언변이 여느 범인과는 달리 비범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처세술 또한 권력의 위엄 앞에서 초연할 정도로 훌륭합니다. 그래서 베스도는 그런 바울의 힘이 머리 속에 많은 지식이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 바울이 비범함을 넘어 오만할 뿐만 아니라 변론 내용은 황당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네가 미쳤도다’라고 선언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바울은 베스도를 향해 예의를 갖추어서 ‘내가 미친 것이 아니고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는 아그립바 왕을 향해 못다 한 증언을 이어갑니다. 바울은 이미 26:3에서 변론 초반에 아그립바 왕을 칭송하며 왕의 유대적 배경이 자신이 변론하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런 유대적 배경이 없는 총독의 제재를 가뿐하게 밀어내고는 모든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아그립바에게 집중합니다. 그리고는 27절에 다시 왕을 부르면서 ‘선지자를 믿으십니까?’라고 갑작스럽게 질문을 하지요.

    아그립바 왕이 대답하기도 전에 바울은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라고 대답을 해 버립니다. 맞습니다. 아그립바 왕은 선지자를 알았고 예수께서 행하신 일과 선포하신 말씀마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설득을 완강히 거부합니다. 이 짧은 시간에, 적은 말로 나를 그리스도인 삼으려냐 하느냐고 하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이렇게 결박당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한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높은 최고의 권력이라 해도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의 복음뿐이라는 사실을 바울은 한 번 더 확실히 강조합니다.

    힘을 숭배하는 로마 제국의 관리인 베스도는 세상을 구원하려고 죽음을 택한 메시아를 이해할 수도 없고, 그 하나님의 가장 큰 능력과 지혜가 가장 미련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 베스도의 눈에 바울은 미치광이로 비춰질 수밖에 없겠지요.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복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적자생존’,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논리로 굴러갑니다. 그런데 그 세상 속에서 ‘죽음으로 구원을 이룬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교회라는 공동체가 어떻게 이해가 되겠느냐는 거죠. 그러하기에 믿는 이들은 세상 속에서 늘 미련한 사람들로 비춰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주님이 가장 지혜로운 구원의 길임을 붙잡아야 합니다.

    7월 첫째 주, 맥추감사주일에 우리는 또 ‘2차 태신자’를 작정합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습니다. 내가 작정한다고 그 사람이 교회로 발걸음을 할까? 내가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까? 그런 회의적인 생각이 많이 드실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 말고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삼는 다른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명령 앞에 오직 순종으로 답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바울에게 복음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었습니다. 복음과 타협할 수 있는 것도 없었습니다. 복음을 대체할 만한 축복도 없었습니다.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바울은 미친 자였습니다. 그가 아그립바 왕을 향하여 한 말은 소중한 것을 버리라는 요구였기 때문에, 결코 아그립바 왕은 그 말에 동의하거나 따를 수 없었습니다. ‘복음을 선택하는 길’이 이 세상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인 생명을 얻는 길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직 복음만이 생명의 길임을 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합니다. 복음을 붙들고 전하는 일입니다. 복음을 붙들고 전하는 일에 전심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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