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행 27:1-20

◎ 본문: 행 27:1-20
◎ 제목: 어떻게든 하신다

1. 본문 개요
    a. 행 27:1-8           로마로의 압송
    b. 행 27:9-20           항해 중 광풍을 만남

2. 관찰
    a. 1-2절: 백부장 율리오의 주도로 항해 시작
    b. 3-5절: 가이사랴에서 루기아 무라까지
    c. 6-8절: 무라에서 그레데 미항까지
    d. 9-12절: 겨울 항해를 만류하는 바울
    e. 13-20절: 바울의 권고를 무시하는 선장과 광풍 유로굴로를 만난 배

3. 적용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일까요? 아니면 어려운 일일까요? 쉬운 일일 수도 있고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온전한 신뢰가 있고, 기꺼이 하나님의 시간표에 나의 시간표를 맞추리라 결단한 사람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에 대해 뚜렷하고 분명한 스케줄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해 존중해 주지 않으신다고 여길 때,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지고 있는 시간과 방법에 대하여 자꾸만 물음표가 그려진다면 단연코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닫게 됩니다. 결국 ‘신앙’의 문제는 ‘관계’의 문제라는 것을 말입니다. 얼마나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서 그분의 성품과 나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굳건한 신뢰로 혹 나에게 주어진 고통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에게 ‘네가 로마에서 증거하리라’는 약속을 주셨고, 결국 바울이 로마행 배를 타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 1절은 바울이 몇 명 다른 죄수들과 함께 ‘백부장 율리오’의 관리 아래에 로마로 가기로 작정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과 지금 사도행전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 그리고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를 지칭하는 걸 겁니다. 죄수들을 호송하는 배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동행할 수 있는지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당시에 죄수를 호송할 때에도 ‘상선’을 이용했기 때문에 일반인의 승선 또한 자유로웠을 겁니다. 2절에 그 상선의 이름이 ‘아드라뭇데노’임을 또한 밝힙니다.

    3-8절은 가이사랴에서 그레데 미항까지의 여정이 기록됩니다. 가이사랴를 떠난 배는 이튿날 첫 번째 기착지인 ‘시돈 항’에 도착합니다. 당시 시돈은 두로와 함께 베니게의 산업과 문물을 책임지는 항구도시였습니다. 백부장은 시돈에서 바울에게 ‘친구들’에게 대접받기를 허락하는 뜻밖의 호의를 베풉니다. 이런 부분을 기록한 것은 당시 백부장 율리오와 바울이 비교적 굳건한 신뢰 관계를 유지했음을 보여줍니다.

    배는 시돈을 떠나서 루기아의 무라 항에 이르렀음을 5절에 기록합니다. 누가는 여기서부터 비교적 자세한 항해 일지를 기록합니다. 시돈에서 서쪽 구브로의 항해는 맞바람 서풍과 북풍은 최소화하고 뒷바람 동풍을 최대한 의지해야 했습니다. 누가는 배가 구브로 섬을 바람막이 삼아 해안에 최대한 근접해서 항해했다고 기록합니다. 과거 3차 선교여행 마지막 시기 밀레도에서 두로로 복귀할 때는 반대로 구브로 섬 남쪽 바다를 이용했습니다.

    배가 루기아의 무라 항에 이르렀을 때에, 백부장은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배로 바울 일행을 갈아타게 합니다. 그런데 무라 항을 떠난 배가 예상 외로 동풍을 제대로 받지 못해 속도가 더뎠습니다. 충분한 추진력을 얻지 못한 ‘알렉산드리아 호’는 결국 섬들 사이를 지나며 간신히 ‘니도’에 도착하게 됩니다. 바람이 좋지 못했지만 항해를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라, 다시 남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그레데 섬으로 향합니다. 다시 섬을 바람막이로 삼아 내려가다가 그레데 동향 ‘살모네’를 끼고 돌며 남쪽 해안선을 따라 가까스로 ‘미항’에 도착하게 됩니다. 미항에 도착해서는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겨울에 접어들어 사실상 항해를 더 이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선원들도 지쳐가고 설상가상 배에 탄 사람들 중 상당수가 ‘금식 절기’를 지키느라 기력이 쇠해 있었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로마로 가서 황제에게, 그리고 그 곳의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비록 죄수의 신분이기는 하지만 지금 바울의 앞길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나선 길입니다. 그런데 순풍만이 바울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역풍으로 배가 나가지를 못하고, 시간은 점점 지체됩니다. 아무리 대의명분이 분명한 의로운 사역이라 할지라도 역풍은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순풍이 늘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표지가 되지 않는 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전대중앙교회 위에 맡겨두신 사역을 감당하여 나아갈 때에 맞이하게 되는 어려움들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한다고 해서 반대에 부딪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방해가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때로는 발목을 잡힐 때도 있고, 더 이상 진전이 안 될 것으로 여겨져 답답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라는 한 가지 확신 가지고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역풍’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고 낙심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9-10절에 바울은 지금 이 상황에서 항해를 강행하게 되면 화물과 배에 큰 손실을 끼칠 것이고 무엇보도 승선한 사람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할 수 있음을 주지시키면서 항해 중단을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하지만 11절에 백부장은 선주의 말을 더 신뢰하여 항해를 강행하려 하지요. 선장은 항해를 만류하는 바울의 말을 묵살한 채, 선주의 뜻을 따라 항해를 결행합니다. 출발하자 순풍을 만납니다. 바른 선택을 한 듯 보였겠지요. 하지만 곧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유라굴로’라는 광풍이었습니다. 그들이 가려는 방향과 정반대 방향으로 표류하기 시작합니다. 간신히 구명선을 붙잡아서 본선에 고정해 놓았지만, 아무도 배를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배의 무개를 줄이려고 짐을 버리고 바다의 기구까지 다 버립니다. 닻을 내린 채 광풍이 이끄는 대로 놔둘 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항해 전문가들의 말을 따른 합리적인 결정처럼 보였지만, 탐욕이 부른 무리한 항해였습니다. 그리고 이 항해를 통해 그들은 처절하게 깨달았을 겁니다. 어떤 것도 이성과 경험으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광풍 하나 풀어버리시면 오도 가도 못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광풍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결코 나의 인생의 주도권이 나 스스로에게 있지 않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내가 붙잡고 쌓아 둔 것이 결코 위기의 때에 나를 지켜주거나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도리어 나를 해롭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때론 다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이 새벽에 결국 우리 인생의 키를 쥐고 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때로는 더디게 가는 것 같고, 돌아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던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끌고 가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바울은 죄수의 몸이었고, 바울을 실은 배는 화물선이고 죄수 호송선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은 바울 한 사람으로 그 배를 ‘선교선’으로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배의 선장이 따로 있고 감시하는 백부장도 있었지만,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배의 운명을 책임지신다고 믿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고, 더욱 그분을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쥐고 계시는 한, 우리를 어떻게든 선한 길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만 신뢰하고 전진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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