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행 28:16-31


◎ 본문: 행 28:16-31
◎ 제목: 로마에서도 복음을

1. 본문 개요
    a. 행 28:16-22           로마에서의 복음 전도
    b. 행 28:23-29           거절당해도 담대하게 거침없이

2. 관찰
    a. 16-20절: 가택연금 상태에서 유대인들을 초청하는 바울
    b. 21-22절: 바울의 복음증거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
    c. 23-29절: 둘로 나뉘어 자리를 떠나는 유대인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d. 30-31절: 멈추지 않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여운

3. 적용
    바울 일행이 드디어 로마에 입성합니다. 로마에서 바울은 한 군인과 함께 따로 거주합니다. 아마도 30절에 언급된 ‘셋집’일 것입니다. 사흘이 지나자 바울은 유대인 중에 높은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여느 때와 같다면 바울이 회당에 직접 가서 복음을 전했겠지만, 지금은 가택 연금 상황이기 때문에 여의치 못합니다. 바울의 손과 발이 된 사람은 아마도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와 아리스다고 였을 겁니다. 그리고 바울을 방문한 유대 지도자들은 회당 공동체 리더들 일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중심지, 로마에서 유대인이 나름 기득권을 얻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약 11년 전에 글라우디오 황제는 유대교와 기독교간의 소요를 빌미로 로마 내 유대인들을 추방하는 칙령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쫓겨났던 사람들 중에 바울과 만나 함께 사역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있습니 다. 그 후에 상황은 많이 변화 되어서 조금씩 유대인들이 로마로 유입되었지만, 그럼에도 정치, 경제, 사회적 기반을 다지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마도 돌아온 유대인들은 로마의 외곽에 흩어져 공동체를 이루며 거주했을 겁니다.

    바울은 로마에 와서도 ‘먼저 동족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은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정황상 그들은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 다만 로마 군인의 감시를 받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심각한 정치범으로 여겼을 겁니다. 바울은 17-20절을 통해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상황을 간략하게 진술합니다. 자신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조상의 관습을 어긴 적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붙잡혀 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졌으며, 심문을 통해 죄를 밝히려고 했지만 죄목이 없어 석방하려 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반대하여 어쩔 수 없이 가이사에게 상소했다고 말이지요.

    바울은 유대인들, 즉 동족들과의 만남에서 자신이 가이사에게 상소한 것이 황제에게 유대 민족을 고발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왜냐하면 행여 자신의 이 고소로 인해서 11년 전에 추방당했던 상황이 재현 될 염려는 안 해도 된다고 안심시키기 위해서였겠지요. 앞으로 온갖 추측이 난무할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의 유대인들에게 미리 설명해줄 필요가 있었을 겁니다. 그러면서 20절에 바울은 자신이 쇠사슬에 매인 것은 자신의 결백이나 명예를 회복함이 위함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이스라엘의 소망은 다름 아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예수님 때문에 온갖 고난과 역경을 지나 매인 채로 로마에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의 소망이라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이처럼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바울을 죽이려 했지만, 바울은 끊임없이 동족을 사랑했고 살길을 전해주기를 원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비록 자신은 ‘이방의 빛’이 되어 열방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고 있지만, 유대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바로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하신 그 일을 먼저 깨닫고 자신과 더불어 이방 가운데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에 같이 하기를 바라고 있음을 전하고 싶었던 겁니다.

    바울의 긴 변론을 들은 유대인들은 21-22절을 통해 자신들은 바울에 대해 어떠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바울에 대해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다고 말하면서 바울이 가지고 있는 사상에 대해 듣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 도에 대하여 어디에서든지 반대를 받고 있는 줄로 자신들은 알고 있기 때문에 바울을 통해 도대체 예수 분의 정체가 뭔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이렇게 떠들썩한지를 알고 싶다는 의중을 바울에게 전달한 겁니다.

    바울은 그러한 유대인들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아침부터 저녁가지 강론합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위임 통치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를 통한 구속을 믿고 그의 통치에 복종할 때 누릴 수 있는 구원을 소개합니다. 그러한 바울의 강론에 대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등 두 부류로 나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견 차이로 갈등하다 자리를 떠나려 합니다. 그렇게 자리를 떠나는 이들을 향하여 본문 25절에 바울은 사 6:9-10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과거 조상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못 깨닫고 보아도 알지 못하는 우둔하고 무지한 상태를 지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복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거절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에게로 하나님의 구원이 보내어 질 것이고, 이방인들은 들을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비록 가택 연금 상태에 있지만 결코 갇혀 있는 사람의 행보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처지와 형편의 어떠함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쓰시고자 하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바울은 우리에게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복음에 대한 불같은 열정과 복음에 대한 명료한 이해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30절에 따르면 로마에 가택 연금 상태로 약 2년여의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 2년의 시간을 보낸 셋집은 바울에게 있어 귀중한 목회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가이사 상소는 지연되었고, 가택연금은 계속되었지만, 바울은 찾아오는 자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는 사역에 더욱 매진하였습니다. 이제는 자기에게 찾아오는 누구에게든지 차별 없이 하나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그리고 거침없이 전했다고 31절은 말합니다.

    제국의 궁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힘 있게 선포되는 한 미결수의 셋집이 유럽의 문명의 역사 지도를 바꾸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전초기지가 되었습니다. 누가는 계속 바울 곁에 머물렀기 때문에 로마에서의 가택 연금 기간 이후에 자유의 몸이 된 바울의 삶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더는 기록하지 않습니다. 누가는 바울을 영웅화 할 생각도, 또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관심 두지 않았습니다. 누가는 바울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 지금도 그 성령께서 증인들을 통해 지속하고 계시는 구원의 사역에 관심을 가졌을 뿐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위대한 복음의 서사를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로마에서 마무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로마에서 끝난 것은 아니지요. 누가는 그 복음의 역사는 바울 이후에도, 그리고 지금 이 시대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읽는 누구든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복음을 증거 하는 성령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를 도전하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사도행전 29장이 계속해서 쓰여 가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지나 왔던, 그리고 오는 모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 다름 아닌 멈추지 않는 증거와 선교의 열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열정적인 말씀 묵상과 연구에 성령충만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가 더해질 때,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전 삶의 영역을 통해 사도행전의 남은 부분을 써내려 가실 것입니다. 그 귀한 사역에 저와 여러분이, 그리고 우리 전대중앙교회가 쓰임 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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