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강도사 / 렘 26:16-24

◎본문: 렘 26:16-24

◎개요

16절 고관들과 백성의 판결

17-19절 그 땅 장로들의 연설

20-24절 여호야김 시대의 예언자 우리야

◎본문연구

오늘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 은혜가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16절은 고관들과 백성의 판결에 대한 내용이고, 17절부터 19절까지는 그 땅 장로들의 연설 내용이며, 20절부터 24절까지는 여호야김 시대의 예언자 우리야에 대한 내용의 말씀입니다.

본문 16절은 고관들과 모든 백성이 주어로 나옵니다. 고관들과 모든 백성은 예언자에게 사형 선고는 부당하다고 선언합니다. 제사장과 예언자가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한 반면에, 고관들과 모든 백성은 우호적입니다. 같은 장, 26장 8절에서 모든 백성이 제사장과 예언자와 동일한 입장을 취하여 예언자를 고발하고 있다면, 16절에서 모든 백성은 예레미야를 보호하려고 합니다. 그들이 변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언자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언자의 선포는 여호와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말을 너희 귀에 말하게 하셨다를 가리키는 것이죠.

고관들과 모든 백성의 판결 이후에 지방의 장로들이 일어나 백성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방의 장로들은 히스기야 시대 모레셋 사람 미가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미가는 소예언서에 나오는 열 두 명의 예언자 가운데 한 명입니다. 본문 18절에 나오는 장로들의 진술은 미가서 3장 12절과 유사한 말씀입니다.

미가 3:12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히스기야는 주전 8세기 후반에 활동한 왕이므로, 예레미야 선지자의 활동 연대와 대략 100년의 시간적 차이가 납니다. 장로들은 미가의 예언을 기억하고 보존하는 전승자의 역할을 합니다. 즉, 장로들은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에 심판 예언자가 존재했음을 보여줍니다. 19절은 장로들이 미가의 선포를 언급한 이유를 보여줍니다. 미가가 예루살렘에 심판을 선포했는데도 당시 사람들은 미가를 해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땅의 장로들은 히스기야도 여호와를 두려워했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나오는 장로들의 서술은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했고, 그로 인해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한 결과를 서술합니다. 여호와는 재앙 선언을 후회했고, 재앙은 임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죠. 이런 장로들의 언급은 이스라엘이 길과 행위를 고치고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면, 여호와께서 재앙에 대하여 후회하시리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선포와 일치합니다.

장로들은 역사를 상기시킴으로써 예레미야 선지자의 선포를 반복한 것입니다. 동시에 미가가 선포한 말씀이 1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효력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장로들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에 큰 재앙을 행하고 있다. 장로들의 말에는 두 차례 재앙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첫 번째는 여호와께서 재앙에 대하여 후회하셨다를 묘사하죠. 그리고 두 번째는 우리가 재앙을 행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만약 제사장과 예언자의 말대로 이스라엘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죽인다면, 그것은 여호와께서 돌이키려고 하신 재앙을 다시 자신들에게 행하는 것입니다. 장로들은 제사장과 예언자가 이스라엘에 재앙을 가져오는 자들임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며 그들의 말을 따르지 말도록 경고한 것입니다.

고관들과 모든 백성의 판결과 지방 장로들의 변론 덕분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 20절부터 24절에서는 다른 경우를 소개합니다. 본문은 한 예언자의 출신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그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루살렘 심판을 예언했음을 명시합니다. 20절에 예레미야의 모든 말과 같이 라는 뜻은 예레미야 선지자 이외에도 유사한 심판 예언자가 존재했음을 보여주죠. 게다가 이 성과 이 땅에 경고했다는 서술은 12절에 이 성전과 이 성을 향하여 예언하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비슷합니다. 다만 우리야는 이 성전을 이 땅으로 바꿈으로써 심판의 대상을 확장합니다. 우리야라는 심판 예언자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유사하게 죽음의 위기에 처했고, 왕, 용사, 고관은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자 예언자 우리야는 죽음의 위기에 두려움을 느끼고 애굽으로 도망했습니다. 예언자 우리야의 상황과 미가의 상황을 대조합니다.

19절과 21절에는 공통적으로 두려워하다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19절은 미가의 심판 선포를 듣고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지도자를 언급하며, 예언자를 해치지 않았던 시대를 서술합니다. 그러나 21절은 우리야의 심판 선폴르 듣고 예언자를 죽이려 하는 시대를 묘사하고, 이로 인해 우리야는 결국 애굽으로 도망해야 했습니다. 즉 히스기야 시대에는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재앙이 임하지 않았다면, 여호야김 시대에는 여호와를 두려워함이 없으므로 재앙이 임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죠. 덧붙여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예언자가 두려워하며 애굽으로 도망가는 모습은 이스라엘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자들이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야가 애굽으로 도망갔는데도 여호야김은 애굽으로 사람을 보내어 예언자 우리야를 강제 송환합니다. 애굽에서 우리야를 끌고 온 후에 여호야김은 그를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23절에 애굽에서 연행하다라는 숙어는 본래 여호와의 뜻에 따라 여호와의 백성을 구원하는 출애굽 사건을 표현하는 관용구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여호와의 뜻을 거스르며 여호와의 예언자를 죽이는 데 사용되었죠. 여호와의 구원 사건인 출애굽 모티브가 폭력적인 모습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지방 장로들이 예레미야 선지자의 변론에서 말했듯이, 이스라엘이 스스로 생명에 큰 재앙을 행하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우리야 예언자를 죽이고 그의 시체를 평민의 묘지에 던지게 했습니다. 이와 유사한 것을 우상을 불사르고 가루로 만든 후에 평민의 묘지에 뿌리는 요시야의 행위에서 볼 수 있죠.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말씀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의 시신을 우상과 같이 처리하여 그를 욕되게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성전에 대해 심판을 예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스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한 우리야가 살해된 것처럼 예레미야 선지자 역시 죽음의 위협을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이에 사반의 아들 아히감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도와주었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39장에서도 사반 가문은 계속해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도와주었고, 40장에서는 사반 가문의 그다랴가 이후에 유다 땅의 총독이 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은 많은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사반의 아들 아히감의 도움으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죽음을 면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도 미가처럼 회심의 반응을 얻을 수 있고, 우리야처럼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목숨을 지킬 수도 있습니다. 즉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그 메시지 자체에 대한 순종인 것이죠. 왜 이렇게 순종이 중요합니까? 순종은 행함이죠. 믿음을 따르는 행함입니다. 믿음을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이죠.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야고보서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함, 순종으로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께 늘 고백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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