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렘 27:1-11

◎ 본문: 렘 27:1-11
◎ 제목: 예언이 삶의 약이 되려면

1. 본문 개요
    a. 27:1-4         표제어와 상징행동
    b. 27:5-11         이방 왕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2. 관찰
    a. 1절: 예레미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
    b. 2절: 줄과 멍에를 만들어 목에 걸라
    c. 3-4절: 이방 민족에게 멍에를 보내라
    d. 5절: 하나님의 자기 소개
    e. 6-8절: 하나님의 징계의 도구로서 바벨론
    f. 9-11절: 거짓 선지자를 경계하라는 하나남의 말씀

3. 적용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정보의 홍수’ 시대라고 하지요. 통신기기가 발달되고, 각종 SNS의 보급으로 숱한 정보들이 만들어지고 소비되고 있습니다. 홍수가 나면 정작 마실 깨끗한 물이 모자라 듯, 정보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유용하고 정확한 정보보다는 가짜 정보들이 유통되고 사람들은 쉽게 현혹됩니다. 최근에 ‘가짜 뉴스’ 때문에 벌어지는 일련의 갈등과 문제점들이 많이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어느 때보다 판단력과 분별력이 요청되는 시기가 바로 지금 이 시대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던 시기도 지금 이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너희가 지금 이대로 계속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을 산다면, 멸망을 면할 수 없으니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당시 눈에 보이는 국제 정세에 편승하여 예레미야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 믿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참 하나님의 말씀보다 거짓 선지자와 지도자들이 내어놓는 정보에 더 귀 기울이는 형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시점을 유다 왕 요시아의 아들 여호야김의 통치가 시작될 때로 묘사합니다. 요시야가 BC 609년, 너무 이른 나이에 죽고, 아들 여호아아스는 3개월 동안 통치했다가 애굽으로 끌려가자, 요시야의 다른 아들인 여호야김이 BC 608에 즉위를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1절이 말하는 시점은 바로 BC 608년을 언급하는 거죠. 그런데 3절에서는 예레미야가 시드기야를 보러 예루살렘에 온 사신들을 언급합니다. 시드기야는 여호야김이 BC 608-598까지 통치하다가 죽고, 그의 뒤를 이은 여호야긴이 석 달을 통치하다가 바벨론에 끌려간 후에, 그 뒤를 이어 왕으로 등극하였습니다. 시드기야는 BC 597-586년까지 유다를 통치 한 마지막 왕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야김과 시드기야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27장 1절에 여호야김을 언급했다가 3절에 시드기야로 넘어가는 것은 26장과 27장 사이의 간극이 대략 10년 이상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겁니다.

    시드기야의 통치 시기를 맞이한 유다 민족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2절에 예레미야에게 ‘상징행동’을 하라고 요청하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줄과 멍에’를 만들어서 목에 걸라는 명령입니다. 줄과 멍에는 가축에게 씌워 쟁기를 끌도록 하는 것이지만, 사람에게 멍에를 씌우는 것은 포로 또는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짊어질 멍에의 무게를 보여주는 겁니다. 여기에서 ‘멍에’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는 ‘모토트’이고, ‘줄’에 해당하는 단어는 ‘모세라’입니다. 두 단어는 발음이 매우 유사해서 ‘멍에 위에 멍에’를 얹어야 하는 이미지를 연상시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져야 하는 짐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지금 사신으로 와있는 사람에게 그 ‘줄과 멍에’를 주어서 그들의 왕에게 보내라고 하십니다. 총 다섯 개 국에서 와 있는 사신들에게 하나씩 주었고, 한 개는 예레미야가 자신의 목에 걸었습니다. 지금 유다에 에돔, 모압, 암몬, 두로, 시돈의 사신들이 시드기야를 만나 예루살렘에 모인 이유는 현재 부상하고 있는 바벨론을 두고 이른바 ‘반바벨론 연합국’을 형성하기 위한 정치적 협의를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줄과 멍에를 주는 상징에 대한 해석은 다름 아닌 ‘바벨론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항복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작정하신 일인데 이 일을 정치적 연합으로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판이라는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신들에게 줄과 멍에를 전달해서 4절에 나타난 것처럼 각 나라의 왕에게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라는 거죠.

    우리는 이 부분에서 여호와가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작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주변국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거죠. 하나님은 창조와 역사의 주권자이십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그가 택한 중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주기로 결정하셨고, 바벨론의 왕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기한이 찰 때까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것입니다. 7절에 하나님께서 ‘그 땅의 기한이 이르기까지 섬기리라’라고 못 박으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8절에 언급하는 바, 바벨론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됩니다. 결코 권력에 순응하기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라도 주권자 하나님의 섭리를 수용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바벨론을 섬겨야 한다고 명령했음에도, 9절에 선지자나 복술가나 꿈꾸는 자나 술사나 요술자가 이르러 바벨론을 안 섬겨도 된다고 말할 것인데 그 말에 귀 기울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다 거짓 예언이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메시지라는 겁니다. 반면에 11절처럼 목에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메고 그를 섬기는 나라는 하나님께서 결국 그 땅에 머물러 밭 갈게 하시고, 살아가게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지 않으면 하나님의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멸망하기까지 벌하십니다. 바벨론의 침략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악에 대한 징벌입니다. 그 징벌의 메시지는 이미 예레미야의 입술을 떠났습니다. 이제 순종하는 일만 남았다는 겁니다. 징벌을 감수하는 것이 땅에 남아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희망’은 참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위배되는 ‘거짓 희망과 근거 없는 낙관’은 멸망과 파멸을 부추길 뿐입니다. 거짓이 뒤섞여서 마치 ‘진리’인 양 포장되어 있는 것들에 속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잘 할 수 있으면서, 세상의 부귀영화도 누릴 수 있다고 말하는 ‘하나님의 뜻을 가장한 사람의 욕망’이 얼마든지 진리로 포장되어서 우리에게 선포될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것을 용납지 않으십니다.

    이 새벽에 모든 것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생각할 때 불의하다 여기는 것도 하나님은 징계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사용하실 수 있는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사도행전을 묵상하면서 깨달았듯, 하나님께서는 유대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도 사용하셔서 이방을 향한 복음 전파의 뜻을 이루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 어떻게 반응함이 옳습니까? 예. 하나님의 ‘예언’이 우리의 삶에 독이 아니라 약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잘 성찰하고, 숙고하고, 살펴 나의 삶에서 고쳐야 할 것을 고쳐 나가는 지혜가 요구됩니다. 그 일을 위해 지금 저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 기도의 자리를 감당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닫고, 더욱 주님을 의지하는 삶을 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보여주실 때, 늘 순종하겠다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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