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강도사 / 렘 28:1-17

◎본문: 렘 28:1-17

◎개요

1-4절 하나냐의 거짓 예언

5-9절 예레미야가 하나냐에게 심판을 선포

10-17절 하나냐의 행위와 예레미야의 선포

◎본문연구

오늘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 은혜가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은 금요기도회가 있습니다. 기도의 자리에 나오셔서 은혜를 다 받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1절부터 4절까지는 하나냐의 거짓 예언의 내용이고, 5절부터 9절까지는 예레미야가 하나냐에게 심판을 선포하는 내용이며, 10절부터 17절까지는 하나냐의 행위와 예레미야의 선포에 대한 내용의 말씀입니다.

본문 28장은 시드기야가 다스린지 4년째 다섯째 달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시드기야는 주전 597년에 등극했으므로 시드기야 4년은 대략 주전 594년경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본문 28장에서는 예레미야를 제외한 또 다른 예언자 하나냐가 나옵니다. 1절은 그의 출신에 대해 기브온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앗술의 아들, 기브온 출신 예언자 하나냐라는 뜻이 됩니다. 이어서 여호와의 성전에서라는 공간을 언급하죠. 이 공간 배경은 예레미야가 성전 뜰에서 말씀을 선포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예언자 하나냐는 제사장과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예레미야에게 말한다는 점에서 앞서 기록된 26장, 27장 말씀과 연결됩니다.

먼저는 예레미야 26장에서 예레미야의 성전 선포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다른 하나는 예레미야 27장에서 예레미야가 제사장과 모든 백성에게 거짓 예언자의 말을 듣지 말라고 선포하는 부분입니다. 28장은 주전 597년 포로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28장과 27장은 명확한 관련성을 보여주죠. 그러나 28장과 26장의 연결성도 고려해야 합니다. 26장은 주전 608년을 배경으로 하며, 28장은 주전 594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두 본문 사이에는 시간적 간격이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주전 608년에 예레미야의 성전 선포에 적대감을 가진 자들이 이후에도 예레미야를 대적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죠. 본문 2절에서는 하나냐의 선포 내용을 이렇게 서술합니다.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그런데 2절 서두에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 이라고 시작하며, 하나냐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합니다. 이를 통해서 28장은 하나냐라는 인물을 제시하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자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하나냐는 여호와께서 바벨론으로 옮겨 간 여호와의 성전 모든 기구를 이 년 안에 되돌려 놓을 것이라 선포하는데, 이 내용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27장에서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이 예언하는 내용이 이것인데, 여호와의 성전의 기구를 이제 바벨론에서 속히 돌려오리라 이렇게 너희에게 예언하는 자가 거짓 예언자인데, 하나냐와 일치합니다.

본문에서 되돌리다라는 동사는 종종 귀환이라는 의미로 번역되었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을 연상시켜 구원사건을 보여줍니다. 3절은 성전 기구의 귀환을, 4절은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돌아오게 한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냐가 포로 귀환을 예언할 수 있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꺽는다는 뜻은 바벨론의 세력이 꺾일 것 또는 바벨론 멸망을 암시합니다. 즉, 하나냐가 선포하는 구원은 바벨론에 대한 심판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5절 이하는 예레미야가 하나냐에게 말하는 내용입니다. 예레미야 역시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제사장과 모든 백성에게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아멘이라고 말하며 6절에 여호와께서 성전 기구와 모든 포로를 바벨론에서 이곳으로 되돌려 오시기를 원하노라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냐의 예언이 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7절 이하에서 예레미야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 뿐만 아니라 이전 예언자들이 예로부터 전쟁과 재앙과 전염병을 예언했다고 말합니다. 전쟁과 재앙과 전염병은 27장에 나오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연상시킵니다. 전쟁과 칼이라는 용어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덧붙여 예레미야는 평화, 샬롬을 예언하는 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경우에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받는다고 선언합니다.

예레미야는 구원 예언자의 경우에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구원 예언자는 예언의 성취가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이와 달리 예레미야는 심판 예언자의 경우에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26장을 고려해, 지방의 장로들은 미가의 선포를 기억하는 자들로서 예레미야보다 100년 전에 활동했던 미가의 예언을 전달합니다. 아주 오래전에 미가는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 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고 말했지만,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언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셨다고 26장에 말씀하고 있죠. 다시 말해, 미가의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는 참된 예언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선포 이후에 갑작스럽게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목에 있는 멍에를 빼앗아 꺾습니다. 꺾다라는 단어는 10절에서 13절 말씀에서 4차례나 나올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목에 있던 멍에를 꺾으며, 모든 백성 앞에서 다시 한번 여호와께서 이 년 안에 모든 민족의 목에서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와 같이 꺾어 버리리라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자는 예레미야가 자기의 길을 가니라라고 말할 뿐이죠.

하나냐의 행동 이후에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임합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냐는 나무 멍에를 꺾었지만 여호와는 쇠 멍에를 만들라고 예레미야에게 명령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새로운 멍에는 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 무거워 감당하기 버거울 것입니다. 둘째, 하나냐는 멍에를 꺾었다고 하며, 단수 명사를 사용합니다. 이와는 달리 13절에서는 복수 명사를 사용하여 다수의 멍에를 만들었음을 묘사합니다.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감당해야 하는 나라는 이스라엘만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마지막으로 하나냐에게 예언합니다. 앞서 이스라엘에 대해 예언했다면, 15절 이하에서 나오는 예언의 대상은 하나냐입니다. 예레미야는 쉐마, 즉 들으라 라는 명령어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하나냐의 행위를 두 가지로 책망합니다. 첫째, 하나냐는 여호와께서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이라고 예언합니다. 이것은 하나냐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다는 것을 가리켜 책망합니다. 둘째, 하나냐는 이스라엘에게 거짓을 믿게 합니다. 이로써 하나냐는 이스라엘을 패망하게 합니다. 하나냐는 여호와께서 보내지 않았지만, 여호와께서 보낸 것처럼 거짓으로 행동합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하나냐에 대해 여호와께서 보내실 것이라 말합니다. 즉, 하나냐를 제거하다, 심판을 의미하죠. 그리고 17절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선포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루어졌음을 간략하게 서술합니다. 이로써 구원 예언자의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예레미야의 심판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드러난 예언의 진위는 하나냐는 거짓 예언자였고, 예레미야는 참 예언자였습니다. 하나냐는 2년 안에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해방을 선언하지만 정작 두 달 뒤에 죽음으로 임할 자신의 인생조차 내다보지 못한 거짓 선지자였습니다. 미래는 하나님께 달려 있고,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뿐 아니라, 이 시대의 미래에 대해서 안다고 확신하거나 점을 보거나 이 모두가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는 행위입니다. 미래를 모르기에 오히려 하루를 살아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오늘 하루가 그만큼 중요하고 뜻깊고 보물같은 하루임을 알 수 있는 것이죠. 이것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하루를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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