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렘 29:15-32
◎ 제목: 거짓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1. 본문 개요
a. 행 29:15-23 바벨론에 일어난 선지자의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
b. 행 29:21-32 거짓 선지자에 대한 심판 예언과 스마야를 고발함
2. 관찰
a. 15-18절: 바벨론의 선지자가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에 대해 예언함
b. 19-20절: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이 심판 받는 이유
c. 21-23절: 거짓 선지자에 대한 심판 예언
d. 24-32절: 예레미야를 고발하는 스마야를 향한 심판 예언
3. 적용
기만과 거짓 평안의 메시지가 횡행하는 시대입니다. 비단 이단의 메시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성도들의 구미에 맞는, 귀에 듣기 좋은 말만 강단에서 쏟아 내는 것 또한 ‘거짓 메시지’일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거짓 선지자들이 호응을 얻었던 이유는 거짓 예언일지라도 구미와 갈망에 들어맞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중의 입맛에 맞는 말만 나열하여 그것을 하나님의 진리로 포장하는 어리석음이 이 시대의 설교자들이 빠지기 쉬운 유혹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메시지는 잎만 무성한 나무를 키울 뿐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저주하셨고 말라 죽어버렸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내 귀에 듣고 싶은 메시지만 들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내 영혼을 저주로 말미암아 죽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고통스럽고 힘에 겨워도 참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열매 맺는 나무가 되고, 찍어 불에 던져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거짓에 휘둘리지 않고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어떤 태도가 우리에게 필요할까요?
오늘 본문 15절을 보시면 누군가가 ‘여호와께서 바벨론에 선지자를 일으키셨다’고 말하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남 유다는 총 세 번에 걸친 바벨론의 침공이 있었고, 포로도 세 번에 걸쳐 잡혀 갔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선지자를 일으키셨다는 사실은 그렇게 최종 멸망 전에 두 번의 침공으로 인해 끌려간 남 유다 사람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일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선지자 중에 ‘에스겔’이 바로 이런 바벨론에서 세워진 선지자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사실 바벨론에서 선지자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당시에 예루살렘에 남겨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을 겁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철저한 ‘성전 중심주의,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자신의 선지자를 이스라엘에게만 보낼 뿐, 결코 포로로 끌려간 자들을 위해서도 선지자를 보내실 것이라고 생각을 못한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온 세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벨론에도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세우실 수 있는 분이고, 게다가 바벨론의 선지자를 통해 지금 여전히 이스라엘 본토에 남아 있는 이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도 있으십니다.
이어지는 16-20절까지는 바벨론에 세워진 선지자들은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남겨진 너희들이 포로민들 보다 도덕적 우위에 있기 때문에 유배를 면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오히려 지금 유배를 가 있는 포로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구원과 평안과 소망이지만,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상한 무화과 같이 만들어서 세상 나라로 쫓아 저주와 경악과 조소와 수모의 대상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들의 선포에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안위와 평안이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괜찮은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부어지는 축복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착각에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이 빠진 걸까요? 21-23절에 나타난 바,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귀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이름이 언급됩니다. ‘골라야의 아들 아합,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지 않은 거짓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였습니다. 바로 지금 남아 있는 자들이 축복받은 자들이고, 바벨론에 잡혀간 자들이 저주 받은 자들이라고 말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지금 현실 가운데 안위와 평안을 누리고 있다고 해서 내 신앙이 하나님 앞에 정당하다는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나에게 지금 아무 걱정과 근심이 없다는 것을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 잣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내가 누리는 평안이 하나님의 보증에 의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징계의 전조일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늘 깨어 있는 것입니다. 혹 내 삶에서 위기가 닥치고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겪게 되는 것들이라면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도 엉망이고, 제대로 된 신앙의 삶을 살지 못한다고 스스로 느끼지만 그럼에도 삶에 어떠한 불편도 느끼지 않고 평안하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복 받은 사람이라고 착각해서도 안 된다는 겁니다. 늘 자숙과 자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말씀하실 때에 아멘으로 받고 그 명령에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루살렘에서 뿐만 아니라 바벨론에 세워진 선지자들 중에서도 거짓이 있음을 오늘 본문은 이야기합니다. 25절에 ‘스마야’라는 선지자가 나오는데, 이 사람은 바벨론 유배인들 가운데 활동하던 선지자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지도층에게 편지를 보낸 겁니다. 스마야는 특별히 27절에 예레미야를 ‘미친 자, 선지자 노릇을 하는 자’로 표현하면서 그를 징계할 것을 촉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30-32절에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게 하시고, 스마야가 오히려 거짓 선지자임을 드러내시면서, 그와 그의 자손을 벌하여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살아남을 자손이 하나도 없게 될 것을 시사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거짓 선지자가 등장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들을 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을 원하는 자들에게 거짓을 전하는 자들의 말은 진실이 되고, 갈망을 채워주면 진실이 됩니다. 하지만 결국 그 거짓을 진실로 받아들인 대가를 치러야 하는 날이 반드시 옵니다. 우리의 마음이 거짓에 휘둘리지 않도록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거짓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음을 변명하지 않고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섭시다. 매 순간 진실함과 도덕성을 갖추려면 언제나 말씀에 젖어 있는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거짓과 진실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늘 말씀이 내 마음을 지배하여 거짓에 휘둘리지 않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