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강도사 / 렘 31:23-40

◎본문: 렘 31:23-40

◎개요

23-26절 유다의 회복

27-30절 심판 극복

31-34절 새 언약

35-40절 여호와의 구원 의지

◎본문연구

오늘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 은혜가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은 금요기도회가 있습니다. 권면하셔서 많이 나와 기도에 힘쓰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23절부터 26절까지의 말씀은 유다의 회복, 남유다의 구원에 대한 말씀이고, 27절부터 30절까지는 심판을 극복하게 된다는 내용의 말씀이고, 31절부터 34절까지는 새 언약이라는 주제에 대한 말씀이고 35절부터 40절까지는 여호와의 구원 의지를 선언하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본문 23절 이하에서는 유다에 대해서 언급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때, 즉 구원의 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다에 대한 구원 선포가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 선포와 연결되어 있음을 21절과 22절에서 보여줍니다. 이 때에 유다 땅과 성읍에는 다시 이 말을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의로운 처소, 거룩한 산이죠. 만약 의로운과 거룩한이 여호와의 호칭을 의미한다면, 본문을 의로운 자의 처소와 거룩한 자의 산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을 지칭하며 예루살렘의 회복과 연결됩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와 함께 그 성읍을 언급하며 유다 땅의 회복을 가리킵니다.

본문에 나오는 돌이킴은 좁게는 예루살렘 회복을, 넓게는 유다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24절에는 살리니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동사의 주어는 유다와 모든 성읍이죠. 유다에는 농경 문화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농부와 유목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목자가 함께 거주할 것입니다. 유다 공동체는 다양한 사람이 어울리며 공존하는 장소가 됩니다. 25절은 유다 공동체에서 피곤한 사람과 연약한 사람이 회복되는 모습을 서술합니다. 심령이라는 단어는 인간학적 개념에서 인간이나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피곤한은 물이 없어 심한 갈증으로 해갈이 필요한 상황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물 댄 동산 같은 사람과 연결됩니다. 덧붙여 상쾌하게 하다는 14절에 나오는 기름으로 흡족하게 하다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25절 상반절은 피곤한 심령, 즉 심한 갈증을 느꼈던 사람이 여호와께 돌이킴으로 물 댄 동산같은 사람으로 변할 것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약한이라는 단어는 12절에 기록된 쇠약하다라는 동사와 연결됩니다. 여호와께서 포로된 자를 귀환시키는 사건은 물리적 포로 귀환을 넘어 유다의 완전한 회복이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27절에서 여호와는 씨를 뿌리는 농부의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그가 뿌리는 씨는 사람과 가축의 씨입니다. 28절에서 여호와는 과거와 미래로 나뉩니다. 여호와의 과거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저자는 깨다라는 동사의 과거형을 사용합니다. 동시에 저자는 동일한 동사의 미래형을 사용하여 여호와의 행위를 묘사합니다. 여호와의 과거 행위는 뿌리 뽑으며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며 괴롭게 하다로 나온다면, 여호와의 미래 행위는 세우며 심다로 요약됩니다. 28절에서 이스라엘의 심판을 요약하는 괴롭게 하다가 추가로 나오는데, 이는 재앙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우리는 뿌리 뽑으며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다와 세우며 심다라는 동사가 모두 예레미야 1장 10절에 나오는 예레미야 소명 기사에서 관찰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8절이 여호와의 징계가 이미 발생한 것을 묘사한다면, 여호와의 구원은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보여줍니다. 29절은 이스라엘의 속담인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라는 속담을 언급합니다. 지난 수요일 조명래 전도사님이 설교했던 에스겔서에서도 이 말씀을 언급하죠. 조상의 죄로 인해 그 후손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이 이해는 포로기에서 관찰되는 사상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자들은 여호와의 심판을 받은 자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들은 더는 성전에 나아갈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약속의 땅인 이스라엘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입니다. 포로민의 후손 출생에 대해서는 예레미야의 서신에서 알 수 있죠.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보낸 서신은 포로지에서 자녀를 낳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렇다면 29절의 속담은 바벨론에서 출생한 자들은 여호와의 심판을 받은 자들인가? 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고 말하며 연대 책임을 거부하고 개인 책임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이와 동일한 것을 유사한 시기에 바벨론 포로지에서 활동했던 예언자 에스겔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죠. 바벨론 포로 사건은 이스라엘 연대 책임에 대한 회의를 불러왔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31절부터 34절까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새 언약이 나옵니다. 전형적인 언약 체결 문구를 사용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세울 언약을 선언합니다. 본문에 언급된 새로운 언약은 이전의 언약이 유지된 상황에서 맺어지는 구별된 새로운 것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과거의 것이 파기되고 맺어지는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32절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하다고 말하며 출애굽 때에 맺은 언약과 비교합니다. 새로운 언약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출애굽과 비교하여 월등합니다. 저자는 이스라엘이 내 언약을 깨뜨렸다고 선언합니다. 히브리 성서는 3인칭 복수 인칭대명사를 추가하고 있는데, 언약을 깨뜨린 주체, 즉 그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원문에는 깨뜨리다라는 동사가 사용되었죠. 또한 저자는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관계를 남편이라는 관계로 규정합니다.

새로운 언약은 이스라엘의 마음판에 기록된 토라입니다. 이것은 깨질 수 있었던 돌판에 기록된 토라와 비교됩니다. 출애굽 시대에 받은 가시적이며 파괴될 수 있는 토라와 비교한다면, 마음판에 기록된 토라는 비가시적이며 물리적으로 파괴될 수 없습니다. 돌판에 기록된 토라는 제사장과 같은 일부 집단이 관리했다면, 마음판에 기록된 토라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알아야 할 토라입니다. 그런 이유로 34절은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라고 선언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스스로 알아갈 것을 암시하죠.

이스라엘의 회복은 옛 언약으로의 복귀에 그치지 않죠. 옛 언약을 어겼으니 새 언약을 맺을 것인데, 그것은 재언약이 아니라 첫 언약이 의도했던 바를 이루는 질적으로 새로운 언약이 되는 것이죠.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이 되고, 과거에 지은 죄가 완전히 용서되는 관계가 되는 것이죠. 어떤 처벌로도 죄를 만족시킬 수 없고 사람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와 형벌의 악순환을 깨뜨리시는 기대 너머의 사랑으로 변화시키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신실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영원한 나라로 세우실 것입니다. 인간의 범죄 때문일지라도 단 한번도 창조 의도와 계획을 포기하신 적이 없으시죠. 새 하늘과 새 땅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이 사실을 믿고 오늘도 소망 가득한 하루를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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