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렘 32:16-25


◎ 본문: 렘 32:16-25
◎ 제목: 하나님의 유능과 사람의 무능

1. 본문 개요
    a. 렘 32:16-25 예레미야의 기도

2. 관찰
    a. 16절: 서론
    b. 17-22절: 찬양- 창조부터 가나안 입성까지
    c. 23절: 고발- 이스라엘의 불순종
    d. 24-25절: 심판- 여호와의 징계

3. 적용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끊임없는 신실함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일관되게 하나님을 향하여 완악함을 보였습니다. 그러하기에 늘 깨닫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지만, 늘 그 구원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로움이 없기 때문에 죄에 대해 무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늘 신실하신 하나님의 유능함에 우리의 구원은 기대어 있음을 인정하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전 본문인 32:1-15절의 내용을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드기야 왕이 통치한지 열째 해인 BC 587년에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이 시점은 이제 예루살렘이 최종 멸망하는 BC 586년의 바로 직전 해입니다. 나라가 망하기 직전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6절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그의 숙부, 샬룸이 가지고 있는 ‘아나돗’의 밭을 사라는 요청을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예레미야의 ‘상징행위’를 통해서 비록 지금 남 유다가 망하는 상황에 놓여 있지만, 결국에는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될 것을 보여주고 계시는 겁니다.

    이러한 상징행동의 내용이 오늘 본문 16절에 언급된 ‘매매 증서’입니다. 그 밭을 구입하고, 그 증서를 바룩에게 넘겨준 다음 예레미야는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첫 마디가 ‘슬프도소이다.’라는 사실에 우리는 의아함을 느끼게 됩니다. 분명 32장 전반부의 내용을 보면 예레미야가 아나돗 땅을 매매하는 과정을 통해 여호와의 구원 계획을 알았을 거란 말이죠. 그렇다면 감사하는 것이 적절한 반응일 것인데 오히려 고통을 호소한다는 것이 앞뒤가 맞지 않은 예레미야의 반응이라는 겁니다.

    더 이상한 것은 17절에 ‘슬프도소이다’라는 한 마디 이외에 17-22절의 내용은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입성까지 여호와의 놀라운 행하심을 찬양하는 내용이라는 점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아도 17절의 첫 마디가 ‘슬프도소이다’로 시작되는 것은 매우 어색합니다.

    ‘슬프도소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단어 ‘아타흐’는 ‘아하!’라는 감탄사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러니까 한글성경에는 ‘부정적’인 의미로 번역을 했지만, 사실은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긍정하는 감탄사라는 겁니다. 그렇게 놓고 원어성경을 그대로 번역해 보면 ‘아하! 주, 여호와여! 보소서’가 됩니다. 그리고 17절에 ‘천지를 지으셨사오니’로 해석된 부분도, 천지를 만드신 일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를 지으신 분이 바로 ‘하나님’ 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겁니다.

    종합해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창조의 능력으로 시대와 지역과 사람을 초월하여 당신의 계획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힘주어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그 하나님이 18-22절에 나타난 것처럼 언약을 따라 의인들을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심판하시며, 그 모략과 지혜를 당할 자가 없고, 인류의 모든 길을 보시고 선악을 따라 갚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예레미야가 인정하고 높여드리고 있습니다.

    지금 예레미야는 ‘절망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소망의 기도’를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지금 현실은 바벨론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되고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이지만, 밭을 매매하는 상징 행동을 통해 예레미야에게 남 유다의 회복을 약속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현실을 직시하되 현실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음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겁니다. 모든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소망의 기도를 이어갈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예레미야의 기도를 배워 우리도 각자의 삶에서 그 기도를 올려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스라엘이 세상과 역사를 하나님의 나라로 창조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출애굽과 광야, 가나안 땅 정복’을 통해 경험하였던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서도 그 창조주 하나님의 일하심은 늘 경험하고 그로 인하여 매 순간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레미야는 23절에서 앞선 18-22절을 통해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 가운데 주인 되심을 하나님께서 드러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주님의 목소리를 순종치 않았고, 주님의 율법 안에서 행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함으로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셨다고 고백합니다. 악인들을 향한 심판의 예언이 지금 이스라엘 땅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말이지요. 24절에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기 위해서 쌓고 있는 흉벽은 점점 올라가고, 바벨론의 공격에 시달리는 성안의 백성들은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25절은 이미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의 손에 하나님께서 넘기셨음이 분명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믿음을 가지고 은으로 밭을 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언하신대로 나라가 망해가고 있는 것이 도리어 의인을 향한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도 반드시 이뤄 질 것이라는 확신으로 다가오게 만든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의 정치, 종교 권력자들은 당장 눈앞에 닥친 바벨론의 위협만 보였지만, 선지자에게는 그 너머에 있을 ‘하나님의 시대’까지 보였기 때문에 밭을 샀습니다. 그가 산 것은 밭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이었습니다. 그는 ‘돈’이 아니라 ‘신뢰’를 주고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산 것입니다.

    이 새벽에 우리도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현실에 매몰되지 않는 성도의 모습으로 굳건히 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선지자가 현실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누구신지를 정확하게 알았기 때문에 그는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나의 무능함만 바라보면 절망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유능하심을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절망 속에서도 참 소망을 발견하고 그 길을 걸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삶이 오직 ‘하나님의 의지’에 달려 있음을 신뢰하고, 더욱 하나님만 굳건히 붙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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