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강도사 / 렘 32:26-35

◎본문: 렘 32:26-35

◎개요

26-27절 여호와의 자기 소개

28-29절 여호와의 심판

30-35절 심판의 이유

◎본문연구

오늘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 은혜가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26절부터 27절까지는 여호와의 자기 소개에 대한 내용이고, 28절부터 29절까지는 여호와의 심판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30절부터 35절까지는 심판의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나돗 땅을 구매하는 상징행위 이후에 예레미야는 기도합니다. 그러나 기도 내용은 구원에 대한 감사보다는 심판 선포에 가깝죠. 이제 그 기도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이 나옵니다. 27절에 나오는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에서 모든 육체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모든 살을 의미하며, 여기에서는 모든 인간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라는 단어와 평행관계로 나옵니다.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 이 문장은 17절에 기록된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라는 문장과 연결되어집니다. 여기에서 일이라는 단어는 말씀, 사건, 일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는데, 여호와의 말은 반드시 일어나 사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임박한 미래를 서술하기도 합니다. 본문은 여호와가 예루살렘 성을 갈대아인의 손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에 넘기겠다는 계획을 서술합니다. 주목할 것은 예루살렘성을 바벨론의 손에 넘길 주체가 여호와로 기록되었다는 점이죠. 저자는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주체임을 서술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바벨론은 여호와의 도구로 전락할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포로기 신학에서 대단히 중요한데,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것은 이스라엘의 패배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신인 여호와의 패배로 이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고 함으로써 바벨론의 신이 여호와에게 승리했다는 이해를 거부하는 것이죠.

바벨론을 움직이는 것은 바벨론의 신이 아니라 여호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9절은 갈대아인이 예루살렘에 와서 성을 치고 예루살렘 성을 불사를 것이라 말씀합니다. 바벨론이 와서 예루살렘에 불을 놓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분노를 일으킨 결과로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바알과 같은 이방신에게 분향하여 여호와의 분노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불을 사용하여 이방신을 섬겼으므로 여호와는 불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신 것이죠. 저자는 이스라엘이 지붕에서 바알을 숭배하고 있음을 말씀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가옥은 2층 가옥 구조입니다. 2층은 지방인데, 옥상 지붕의 구조이죠. 예레미야는 지붕에서 천체를 숭배하고 있었음을 묘사하는데, 예레미야 19장 13절에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렘 19:13 예루살렘 집들과 유다 왕들의 집들이 그 집 위에서 하늘의 만상에 분향하고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더러워졌은즉 도벳 땅처럼 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

저자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격노하게 했음을 29절에서 묘사합니다. 그리고 30절과 32절에서도 동일한 동사가 사용되고 있는데, 32절에는 노여움으로 번역되었죠. 31절에도 노여움과 분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은 격노와 유사한 뉘앙스를 보여주는 것이죠. 다시 말해, 저자는 이스라엘 심판이 여호와의 진노의 결과이며, 진노 원인은 이스라엘의 행위라고 말합니다. 30절부터 31절에는 히브리어 키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문장이 3회나 나와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키라는 단어는 왜냐하면 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저자는 예로부터라고 언급하는데, 젊었을 때부터를 의미하는 단어이죠. 이것은 이스라엘의 죄와 악이 일시적이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죠. 23절에 따르면 이 시기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직후로 간주됩니다.

덧붙여 본문에는 아크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무엇 뿐이라로 번역했습니다. 부언하면, 이스라엘은 여호와 앞에서 선을 행한 적이 없고, 악을 행하였을 뿐이라는 거죠. 이를 통해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입성하여 멸망하기 전까지 역사를 악의 역사로 규정합니다. 저자는 이스라엘이 손으로 만든 것과 악을 행하다를 평행하게 놓습니다. 왜냐하면 두 단어는 동일한 어근을 갖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손으로 만든 것과 악을 행하다가 같다는 것이죠. 덧붙여 이 동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지으신이라는 뜻을 묘사하는데에도 나옵니다. 이로써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행위는 대조되며, 저자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율법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이어서 31절은 이 성이 건설된 날부터 오늘까지를 말합니다. 이것은 30절에 언급된 예로부터와 연결됩니다.

본문은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지금까지 관계를 암시합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앞에 두며 특별한 관계를 맺어왔지만, 이제는 그들을 자신의 앞에서 치울 것이라는 거죠. 옮기다라는 단어는 대단히 완곡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심판의 상황에서 이것은 제거하다, 쫓아내다, 혹은 폐하다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이방 땅에서 유리할 것이며 보호하는 아이처럼 될것입니다. 에스겔은 이러한 예루살렘을 들에 버려진, 피투성이, 그리고 벌거벗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 모습을 묘사합니다. 본문 32절은 다시 한번 이스라엘 자손과 유다 자손이 모든 악을 행하여 내 노여움을 일으켰음이라고 선언하는데, 30절과 유사하죠. 하지만 30절이 이스라엘 조상 때부터 악을 행하고 있음을 묘사한다면, 32절은 당대 사람들이 악을 행하고 있는 것에 주목합니다.

저자는 이스라엘의 악이 세대를 뛰어넘어 지속되고 있음을 고발합니다. 더 나아가 본문은 악을 행하는 주체를 왕들과 그의 고관들과 그의 제사장들과 그의 선지자들과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로 명시합니다. 악을 행하는 것은 일부 계층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지도층부터 주민들까지 모든 사람이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창세기 6장이 노아가 등장하는데, 노아가 등장하기 전에 6장 5절에서 세상이 어떠함을 한줄로 묘사하고 있는 말씀과 같죠.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다.

여호와께서 세상을 심판하셨듯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죠. 왜냐하면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악을 행하고 있으므로 여호와의 심판에서 살아남을 자는 없게 되겠죠.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들을 들으며 그 말씀을 경청하고 시대를 분별해야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또한 모두가 악을 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 짧은 소견으로는 지금 이 시대가 이전보다 덜 악하지는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악을 행할 뿐 아니라, 악을 옳다 옳다 하지 말라고 성경에서 말씀하는데, 악을 옳다 옳다 하고 자신도 그 악을 저지르는 시대가 지금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둠이 짙은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빛을 발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그마저도 빛을 잃게 되고, 빛을 찾는 이들에게 소망이 아니라, 절망만 안겨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악한 시대일수록 더욱 예수그리스도의 빛을 발하여 우리의 주변을 밝게 비추는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댓글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