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렘 33:1-13

◎개요

1-3절 여호와의 계시

4-9절 유다와 예루살렘의 심판과 구원

10-13절 유다와 예루살렘의 회복

◎본문연구

오늘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 은혜가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은 수요예배가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함께 나와 주님의 기쁨이 되고, 은혜를 누리는 예배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1절부터 3절까지는 여호와의 계시에 대한 말씀이고, 4절부터 9절까지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심판과 구원에 관한 말씀, 그리고 10절부터 13절까지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 1절에서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32장에 나오는 예레미야는 유다의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혔으니와 연결됩니다. 즉, 본문은 예레미야가 여전히 갇혀 있는 상태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절 말씀에서 예레미야는 여호와를 서술합니다. 일을 행하시고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분이라고 서술하죠. 여기에서 일을 행하시고는 만드시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이라고 할 때, 만들다는 짓다를 의미하며, 성취하다는 견고하게 하다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 2장에서 관찰되는 뜻이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3절에 부르짖으라는 뜻은 부르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부르짖음과 기도 응답의 도식이라기보다는 대화를 위한 부름입니다. 그리고 3절 마지막에 보이리라는 단어는 여호와의 계시를 보여줍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와의 대화를 통해 이전에 알지 못했던 여호와의 계획으로 자신을 채워가는 것이죠. 4절 이하 말씀은 심판과 구원을 서술합니다. 여호와가 심판하고 구원하는 대상은 성읍, 성입니다. 이후에 4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 성의 집과 왕궁에 대한 선포임을 보여줍니다. 참호와 칼은 이스라엘을 침공하는 바벨론의 무기를 묘사하는 군사 용어입니다. 참호로 번역된 단어는 공성전을 위한 장비이죠. 막강한 전력을 갖춘 바벨론의 진격에 이스라엘은 대항했지만, 그것은 이스라엘을 심판하려는 여호와의 뜻에 저항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분노는 그칠 줄 모릅니다. 여호와의 심판 도구인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살육했고 시체로 예루살렘을 채웠습니다. 예레미야는 노여움과 분노를 연속하여 말함으로써 여호와의 진노의 정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본문은 여호와께서 얼굴을 가리었다고 묘사합니다. 본문이 가리키는 얼굴을 가리다는 뜻은 두 가지 모습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그들은 숨어 있는 여호와의 얼굴을 찾을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에게 얼굴을 비추는 것이 돌봄을 표현한다면, 여호와께서 얼굴을 가리셨으므로 이스라엘은 환난에서 여호와의 도움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죠.

둘째는 여호와께서 얼굴을 가리다는 여호와의 입장에서 외면하다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에게 이스라엘은 더는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언약 관계가 파기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가 얼굴을 숨기시는 이유를 그들의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라고 명확하게 서술합니다. 여호와가 얼굴을 가린 이유는 이러한 의미인 것이죠. 이와는 반전되는 분위기가 6절부터 등장합니다. 6절은 보라! 라는 단어로 시작하여 분위기 변화를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치료를 의미하는 다양한 용어가 나옵니다.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여기에 나오는 용어는 차이는 있지만 모두 치료를 의미합니다. 뒤이어 평안과 진실의 풍성함 이라고 나오는데, 이는 노여움과 분함, 그리고 시체와는 상반된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내가 얼굴을 가리다라고 말했다면, 이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나타내다라고 서술합니다. 이로써 예레미야는 구원으로의 전환을 명시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어서 7절에서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다라고 묘사하죠. 이 짧은 문장에서 포로, 돌아오다를 뜻하는 단어가 3차례나 등장을 합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귀환시킨 후에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것을 세우다라는 동사를 활용하여 표현합니다. 이 세우다라는 동사는 예레미야 소명기사에 나오는 건설하다와 동일한 용어이며, 집을 지으라고 포로로 끌려간 자들에게 서신을 보낸 예레미야의 명령과 일치합니다.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귀환하고 세워지는 것은 예레미야 소명기사의 실현인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구원 행위를 지난 날처럼이라고 언급하는데, 이것은 처음처럼의 뜻합니다. 여호와의, 새로운 구원은 처음 사건과 견줄 만큼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귀환시킨 후에 죄악에서 정하게 하고 죄악을 사할 것이라고 8절에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정하게 하다는 레위의 정결 규례에서 빈번하게 나옵니다. 즉,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귀환 사건을 제의적 정결이라는 틀에서 해석합니다. 그리고 사하다라는 표현은 속죄의 개념을 담고 있는데, 새언약 체결에 앞서서 여호와께서 준비하실 것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따라서 8절과 9절은 여호와의 새언약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귀환시키고 예루살렘을 재건하면,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라고 9절에 말씀하죠.

예루살렘이 여호와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신 곳임을 염두에 둔다면, 여호와의 기쁜 이름은 새롭게 재건되는 예루살렘을 연상시키는 것이죠. 하지만 예레미야서는 세계 열방 앞에서 라고 9절에서 언급하며,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을 위한 곳이 아니라 만민을 위한 곳이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여호와는 앞에서 예루살렘에 재앙을 가져왔다면, 이제는 복과 평안을 가져올 것이라 말씀합니다. 이것은 6절에 언급된 평안과 진실과 비슷합니다. 본문은 여호와가 이것을 이스라엘에게 베풀 것이라고 반복하며 말씀하고 있고 여호와의 약속을 확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아니 버리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말씀으로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을 끝까지 이루시는 분이시죠. 그래서 바벨론에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결국 가나안 땅에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예루살렘을 다시 재건하게 하시죠. 마찬가지로, 한번 예수님을 믿게 된 자녀들은 절대로 구원에서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탕자와 같이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죠. 그리고 그 탕자 자신을 매일같이 안타까워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더 깊이 깨닫게 되겠죠.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 탕자였음을 기억하고 이제는 탕자의 아버지의 마음으로 주님의 자녀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도하고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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